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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사랑의 쿠키를 선물하세요! 화이트데이 맞이 50% 세일]
3월 13일 월요일, 예림은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인스타그램 피드를 구경하다가 한 광고에 눈이 멎었다. 예쁘고 귀여운 쿠키들을 인스타 감성 가득한 소품과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내일이 화이트데이구나. 예림은 저도 모르게 광고에 연결된 더보기 링크를 눌렀다. 새하얀 화면 상단에 로딩 바가 차올랐다. 곧 열린 인터넷 새 창에는 # Cookie Jar 라는 상호명과 함께, 광고 팝업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이 광고는 짝사랑하는 상대를 생각하던 사람에게만 보여지는 광고입니다. 선택받으신 당신, 마법의 쿠키와 함께 최고로 황홀한 화이트데이를 즐겨보세요!]
에림은 무심하게 광고 문구를 읽고 팝업창을 닫았다. 반짝이 효과를 적용해 찍은 쿠키 사진들이 차례차례 목록에 떴다.
"쿠키에 뭔 반짝이 필터야...."
음식과 반짝이 조합에 예림은 못미더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상품명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품명이 하나같이 특이했다.
[강인한 사자의 심장, 용기의 쿠키] -사자 머리가 그려진 아이싱 쿠키였다.-
[박학다식 마녀의 두뇌, 지혜의 쿠키] -마녀가 빗자루를 탄 모양의 아이싱 쿠키였다.-
[유쾌한 삐에로의 미소, 행복의 쿠키] -웃는 얼굴이 그려진 아이싱 쿠키였다.-
그리고
"[강렬한 사랑의 묘약, 사랑의 쿠키]..."
가장 상단에 있던 새빨간 하트 모양의 쿠키가 예림의 눈을 사로잡았다. 화이트데이 특가 상품인 그 쿠키였다. 분명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모양의 쿠키인데, 이놈의 반짝이 필터가 최면을 거는 게 분명했다. 예림은 홀린 듯 사랑의 쿠키를 클릭해 상품 상세 페이지로 넘어갔다. 다각도로 찍은 상세 사진 여러장을 손가락으로 휘휘 넘겨 본 후, 설명글을 읽기 위해 눈을 돌렸다. 설명글은 쿠키의 이름이나 특이했다. 300g, 10개입. 체리 맛. 한국마녀협회에서 공인받은 안전한 식품입니다. 신선한 사랑의 묘약이 10% 첨가되어 일주일 간 강한 사랑의 힘을 유지합니다...... 유의: 쿠키를 삼키는 순간 눈 앞에 있는 상대에게 효과가 발휘됩니다. 강한 항마력을 지닌 사랍이 섭취할 경우 효과가 없거나 미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환불이나 반품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예림은 멍한 눈으로 설명글을 다 읽은 후, 결제 페이지로 넘어갔다. 50% 세일 해도 3만 원대라, 비싸긴 하지만 설날 때 모아둔 비상금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또박또박 틀리지 않고 주소를 입력한 다음 결제까지 완료했다. 일련의 과정이 머뭇거림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결제를 끝낸 후 인터넷 창을 닫고 나서 인스타그램 피드로 돌아오고 나서야, 예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김예림? 방금 뭐 한거야?"
예림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직도 눈 앞에 반짝이 필터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빨리 환불해야겠다, 예림은 쿠키 샵 홈페이지에 재접속하기 위해 인스타그램 피드를 뒤졌지만 같은 광고는 다시 뜨지 않았다.
"가게 이름이 뭐였더라?"
샵... 쿠키... 아, 해시태그 쿠키 자! 예림은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을 칭찬하며 검색창에 #cookiejar을 검색했다. 무슨 여자 아이돌 사진이 절반, 나머지는 평범한 쿠키 사진이나 쿠키 단지 사진이 떴다. 그 쿠키 샵 홈페이지나, 후기글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을 나가 네이버, 다음, 구글에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사기당한 거 아니야?"
예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베개 위로 엎어졌다. 인터넷에서 쿠키 샵 홈페이지를 찾는 동안, 문자메세지가 오기는 했다. 카드사에서 날아온 결제 알림 문자와 쿠키 샵이 분명한 곳에서 온 결제 확인 문자 두 건이었다. 쿠키 샵에서 온 문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 Cookie Jar 에서 구매하신 '사랑의 쿠키' 결제가 확인 되었습니다. 해당 상품은 화이트데이 특가 상품으로 3월 14일까지 배송이 완료됩니다. # Cookie Jar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배송이라도 하나... 지금 저녁 11신데?"
사기도 정성껏 치니까 할 말이 없네... 예림은 엎드린 채로 데굴 굴러, 바로 누우며 중얼거렸다.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예림은 눈을 감은 채로 손만 더듬거려 이불을 끌어올렸다. 어질어질 한 게, 일찍 자야할 것 같았다.
밤 사이, 예림의 집 앞 복도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드르륵 울려 퍼졌다. 구두를 신은 사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또각대는 구두 소리가 두어 걸음 난 후, 부스럭대며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예림은 잠결에도 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예림은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꼴로 거울 앞에 섰다. 밤 중에 시끄러워서 살짝 깬 뒤로 나쁜 마녀가 자신을 잡아먹겠다고 쫒아오는 이상한 꿈을 꿨다. 자신은 꿈에서 쿠키였다. 퉁퉁 부은 얼굴에 차가운 팩을 얼마간 대고 있다가, 평소처럼 씻고 밥 먹고 교복 입고 가방을 챙겼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예림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가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창문이 왜 이렇게 활짝 열려있지?"
예림은 부르르 몸을 떨며 창문을 닫았다. 등교하기 위해 몸을 틀던 예림의 눈에 현관문 옆에 놓여있는 상자가 눈에 띄였다. 예림은 상자를 집어들고 글씨를 읽었다.
"해시태그... 쿠키 자, 아!"
예림은 잊고 있던 밤중의 사건이 떠올랐다. 꿈을 꿨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상자가 도착해서 자신의 눈 앞에 있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무슨 동화책에 나올 마녀 이야기도 아니고, 마법같은 쿠키들이나 이상한 쿠키재료며 효능까지 전부. 그리고 자신도 이상했다, 어제는. 평소라면 그런 것들을 비웃고 넘어갔을 텐데. 어제 밤에는 자신이 미쳐있던게 분명했다. 상자를 들고 잠시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예림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등교 시간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예림은 집으로 잠시 들어가서 상자를 개봉했다. 카드 한 장과 쿠키 단지로 보이는 뽁뽁이 뭉치가 보였다. 먼저 카드를 꺼냈다. 검정색 바탕에 외곽에는 금테 장식이 있고, 흰색의 유려한 글씨로 유의사항이 적힌 카드였다.
1. 반드시 쿠키를 섭취하는 순간 함께 계십시오. 쿠키를 삼키는 순간 눈 앞에 있는 상대에게 효과가 발휘됩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효과가 나타나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2. 강한 항마력을 지닌 사랍이 섭취할 경우 효과가 없거나 미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환불이나 반품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3. 휘발성이 강한 묘약 특성상 마법의 지속시간은 제조일자부터 일주일입니다. 일주일 이후에는 평범한 쿠키로 돌아갑니다. 제조일자: 2020년 3월 14일 02:21
4. 한 번 각인이 된 후에는 일주일 동안 다른 사람을 보고 쿠키를 섭취해도 각인이 풀리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5. 만약 쿠키를 먹은 사람이 두통, 어지러움, 메스꺼움을 호소할 경우 이 카드를 완전히 찢으십시오. 마법에 민감할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이며 해독을 위해 십 분 내로 마녀를 보내드립니다.
예림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이런 걸 줘도 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일단 질렀으니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림은 카드를 내려두고 칭칭 감긴 뽁뽁이를 풀었다. 아주 꽁꽁 감아놨구나. 뽁뽁이를 다 헤치고 나자 한 손으로 들 만한 크기의 쿠키 단지가 나타났다. 단지는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영롱한 유리 단지였다. 둥그런 항아리 모양에 뚜껑에는 빨간 리본이 매여 있는 단지였다. 안에는 탐스러운 붉은 빛을 띤 하트 모양 쿠키가 들어있었다. 네모낳고 작은 무언가도 들어있었는데, 예림은 방부제라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쿠키 단지를 돌려보며 내부를 한참 살피던 예림은 한숨을 내쉬며 쇼핑백을 찾아 안에 단지를 넣었다.
예림이 짝사랑 중인 상대는 같은 고등학교의 한 학년 위 선배인 승완이었다. 승완은 잘생긴 외모, 천사도 울고갈 성품,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못 하는 게 없는 다재다능한 능력 등 셀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예림은 승완의 웃음을 가장 좋아했다. 싱긋 미소짓는 것도 좋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목을 젖히며 하하하 웃는 것도 좋았다. 웃을 때마다 휘어지는 눈매에는 사랑스러움이 담뿍 담겨있다. 당연하지만 승완은 예림의 입학 전부터 이미 학교의 인기인이었다. 여자고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듣기로는 승완은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고백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고 했다. 그런 승완의 인기는 작년 가을, 승완이 학생회장에 당선되며 더욱 치솟았다.
예림은 고등학교 입학식 날, 길을 헤메고 있을 때 자신을 도와준 승완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처음 와 본 학교 안에서 당황한 예림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도와주던 승완의 상냥함과 시원스런 외모에 한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승완이 학생회 소속임을 알게 된 예림은 기를 써서 학생회에 들어갔고, 승완과 집 방향이 같다는 걸 알고 종종 집에 같이 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예림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승완에게 그저 같은 학생회 소속인 후배, 친하지만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는 아닌, 아는 동생 1 이었다. 승완이 학생회장에 출마할 때 승완에게 부학생회장 출마해볼래? 라는 제안을 받긴 했지만 예림은 자신이 없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 하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획력, 추진력이 좋다거나 다른 특출난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림은 승완과 더 가까워지고 싶고,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 이상으로 승완에게 폐가 되기 싫어 결국 거절했다. 예림의 거절에 승완은 잠깐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묻지 않고 다른 1학년들에게 부회장을 권유했다. 그럼 그렇지. 예림과 특별히 친하다거나 능력을 인정해서가 아닌 자격이 되는 후배들에게 예의상 한 번씩 권유하는 것일 테였다.
"그 때 승완선배가 부회장 하자고 할 때 하는 거였는데..."
예림은 더 이기적으로 굴 걸, 하고 후회했다. 승완은 학생회장이 된 후 인기가 더 많아지기도 했지만 더 바빠졌다. 이 학교에서 승완을 찾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부학생회장이 된 애는 예림이 보기에 자신처럼 승완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애였다. 각종 기념일마다 대놓고 승완에게 선물공세를 하는게 눈꼴시렸다.
"뭐, 나도 할말없게 됐네."
예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어제부터 부쩍 한숨을 많이 쉬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예림은 지금 학생회실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방과후에 학생회 전체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승완에게 말을 걸어 선물을 줘야겠다고 다짐한 예림은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회의석에는 이미 승완이 가장 먼저 와서 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아래에 앉아 있는 승완의 모습에 예림은 심장이 떨렸다. 갑자기 긴장되는 바람에 예림은 숨을 흡 삼켰다. 승완은 집중하느라 누가 들어온 걸 늦게 알아챘다. 승완은 고개를 들었다가 예림이 들어온 것을 보고 예림이 가장 사랑하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예림아, 왔어? 일찍 왔네."
"네, 선배 도와주려구요."
예림은 자신의 자리에 가방과 쇼핑백을 올려두고 나서 승완의 곁으로 다가갔다. 승완은 회의 자료를 스테이플러로 찍고 있었다. 예림은 승완의 옆에 앉아 스테이플러를 찍기 편하게 자료를 장수별로 세어 내밀었다. 고마워, 승완은 잠깐 예림을 보고 미소지으며 종이를 받았다. 조용한 학생회실에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스테이플러를 찍는 소리만 났다.
"선배는 이런 건 후배들 시키지."
예림은 안그래도 바쁜 승완이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아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니야. 다들 새학기라 정신 없잖아. 여유 있는 사람이 해야지."
"여유는, 선배 아까도 급하게 교무실 가는 거 봤거든요."
"아, 봤어? 들켰네."
승완은 멋쩍게 웃었다. 그런 웃음 역시도 사랑스러웠다. 그래, 승완은 이런 사람이었지. 그래서 반했으니까. 예림은 승완을 따라 웃었다.
"다음에는 저도 불러 주세요. 혼자 하지 말고."
"알겠어."
마침 인쇄물 준비가 다 끝나고 다른 회의 준비는 승완이 미리 끝낸 후였다. 예림은 지금 쿠키를 줘 버릴까, 하는 생각에 인쇄물을 한번에 들고 바닥으로 톡톡 치는 승완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배, 저...!" "선배! 먼저 와 계셨네요. 빨리 오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붙잡아서요, 저 기다리셨죠?"
타이밍도 참 좋게 학생회실 문이 벌컥 열리며 부학생회장이 들어왔다. 승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림과 부회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부회장은 예림이도 있었어? 라고 말하며 승완과 예림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언니, 이따 저랑 집에 같이 가요. 오랜만에."
예림은 급하게 승완의 옷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승완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라는 호칭은 예림 나름의 만능키였다. 승완은 모두에게 다정하지만 바르고 예의바른 이미지가 강하고, 또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는 성향이 있어서 1, 2학년들은 모두 승완을 '선배'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가끔 '언니'라는 호칭으로 말을 시작하면 승완은 어떤 것이든 다 들어 주었다. 이것도 승완과 종종 집에 함께 가며 알아낸 것이었다.
"저 빼고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거에요?"
부회장은 승완과 예림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승완에게 치댔다. 예림은 의자째로 밀려나며 뒤에서 부회장을 흘겨봤다. 은근히 사람 무시 잘 한단 말이지. 회의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예림이 앉아있던 자리가 부회장의 자리기도 해서 예림은 순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곧 다른 학생회원들도 들어오며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는 승완의 주도로 순조롭게 끝났다. 소란스럽게 문 밖을 나서는 학생들 사이로 예림은 가방과 쇼핑백을 챙겨 승완에게 다가갔다.
"선배, 오늘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갈래요?"
빠르기도 해라. 부회장이 그새 승완에게 팔짱을 끼며 치근댔다. 저럴 줄 알고 선수 쳐 놨지. 예림은 부회장에게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물론 상상으로만. 승완은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예림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럼, 잠깐만요. 할 얘기 있단 말이에요. 괜찮지?"
부회장이 멀뚱히 서있는 예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승완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승완이 눈으로 물었다. 예림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어. 예림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래?"
"네."
예림은 가까운 의자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부회장은 예림 쪽은 보지도 않고 승완을 잡아끌고 학생회실을 나갔다. 부회장 손에도 예쁜 쇼핑백이 들린 걸 보니 화이트데이 사탕이라도 주려는 모양이다. 예림은 턱을 괴고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승완과 부회장이 돌아오는 게 꽤 걸리네? 하고 생각할 때쯤, 승완이 혼자 돌아왔다. 손에는 아까 부회장이 들고 있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예림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얼른 집에 가요."
예림은 가방을 두고 간 부회장이 왜 다시 오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나랑 상관없지, 하고 넘겼다. 예림에게는 승완과 함께 집을 가고 쿠키를 건네주는 것, 그리고 쿠키를 먹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예림은 갑자기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승완이 서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승완과 예림은 함께 길을 걸었다. 개학 후 처음으로 같이 집에 가는 거였다. 둘은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새 학년과 새 학급에 대한 이야기, 공부와 성적에 대한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길 옆으로 개나리,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고 복사꽃도 꽃봉오리를 맺었다. 바닥에는 흙과 돌, 풀의 틈에서 민들레와 데이지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파릇한 봄 내음에 예림은 덩달아 벅차올랐다. 신나서 통통 튀어오르는 예림을 보고 승완은 배를 잡고 웃었다. 노을의 끝자락을 달리는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았다. 활활 타오르는 태양과 노을의 색깔은 불의 색과 닮아있었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더 가까운 예림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승완의 집은 여기서 더 걸어야 했다. 길가에 서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고, 승완과 예림은 잠시 말없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들어가야지, 예림아."
"네, 선배... 근데, 저...... 드릴 거 있어요."
예림은 학교에서부터 내내 꼭 쥐고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승완은 토끼눈이 되었다.
"이게 뭐야?"
"오늘 화이트데이라면서요. 생각나서 샀어요."
눈도 못 마주치면서 말하는 예림을 보며 승완은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와, 진짜 감동이다. 꺼내봐도 돼?"
"당연하죠... 지금 먹어요."
승완은 내용물을 꺼내기 전 쇼핑백을 벌려 안을 들여다보고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쿠키..."
"쿠키가 왜요?"
괜히 뜨끔 찔린 예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예쁘다."
승완은 쿠키 단지를 꺼내서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갖혀 있던 달콤한 냄새가 훅 퍼져나왔다. 승완은 빨간 하트 모양의 쿠키 하나를 집어들었다. 쿠키는 한입에 쏙 들어갈만한 크기였다. 승완은 망설임 없이 입에 쿠키를 넣고 오물거렸다. 승완이 쿠키를 씹고 삼키는 순간이 예림에게는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예림은 오물거리는 승완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긴장되는 마음에 주먹을 꾹 쥐었다. 승완의 작고 오동통한 입술이 쿠키를 얌얌대다 꼴깍 삼켰다. 예림은 쿠키가 꼴깍 넘어갈 때 자기도 모르게 함께 침을 삼켰다. 곧이어 예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찬찬히 벌어지는 입술에서 나오려는 첫 마디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단어가 되고 단어가 문장이 되는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이거 맛있다!"
"......아 그래요?"
"응, 어디서 산 거야?"
"...어... 인터넷으로 사서 기억이 안 나네. 다음에 알려줄게요."
승완은 선물 고맙다고 말하며 예림의 머리를 쓰다듬고 곧 자신의 집 쪽으로 떠났다. 하아아아, 예림은 승완 앞에서 가까스로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사랑의 묘약은 무슨. 21세기에 마녀같은게 있을 리가 없지! 그냥 쿠키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수작이었다! 예림은 화가 나서 발을 콩콩 구르다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지나가는 이웃 주민을 보고 잽싸게 얌전해졌다.
"속아 넘어간 내가 멍청이지..."
에효, 집에나 가자. 예림은 내일부터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어, 예림아. 안녕?"
예림은 아파트 입구를 나오다 입이 떡 벌어진 채로 그대로 뒷걸음질 쳐 기둥 뒤로 숨었다. 21세기에도 마녀는 있었다. 그것도 인터넷 속에!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급하게 거울을 꺼내 머리카락을 정돈한 예림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그래도 기다린 것 같은데, 시간을 더 끌 수 없어 예림은 후하 심호흡을 하고 다시 나갔다. 예림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자신의 집 앞에는 승완이 서 있었다.
"선배, 어쩐 일이에요?"
"그냥. 네가 금방 나올 것 같아서."
승완은 멋쩍게 웃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데요?"
"음... 20분 전?"
헤헤 웃는 승완을 보며, 예림은 오늘따라 늦게 집을 나온 자신을 원망했다. 잠깐, 20분? 예림은 승완을 휙 돌아보며 외쳤다.
"20분?! 선배 아침에도 바쁘잖아요!"
"하루 정도는 괜찮아."
"괜찮긴, 지금 저 아슬아슬하게 나와서 지각할지도 몰라요!"
일단 지각을 면하는게 우선이었다. 예림은 승완의 손을 잡고 달렸다. 다행히 학교까지는 멀지 않았다. 예림과 승완은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자 달리기를 멈췄다. 승완은 뛰어서인지, 예림의 손을 잡아서인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예림이 손을 놓자, 승완은 아쉬운 듯 손을 만지작거렸다.
"선배. 기다릴 거면 연락하지 그랬어요."
"그러게, 생각을 못 했다. 원래도 이 시간에 등교하니?"
"오, 오늘만 좀 늦게 나온 거에요. 평소엔 더 일찍 나와요."
"그래? 그럼 내일은 안 뛰어도 되겠네."
"...내일도 저랑 같이 가려구요?"
"응."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승완의 모습에 예림은 현실감이 없어 멍했다. 그 바쁜 승완이 장장 20분을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거기다가 내일 아침도 함께 등교할 거라고 말하다니. 예림은 아직 자신이 꿈에서 깨지 않았고 현실의 나는 침대 위에서 허우적대며 늦잠을 자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승완이 안 보이게 몸을 틀어 볼을 살짝 꼬집어본 예림은 아프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예림과 승완은 사이좋게 교문을 통과했다. 아직 서 있는 선도부 학생들과 선생님이 이 시간에 온 승완을 보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둘은 건물 안 계단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놀랄 일은 아침이 끝이 아니었다. 예림은 3교시가 끝나고 잠을 자려고 책상 위에 엎어지다가 교실을 나가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머, 승완아. 왜 여기 서있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 반 학생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
"그래, 점심시간 지나고 잠깐 교무실 들르는 거 알지?"
"네, 이따 뵐게요."
복도에서 들리는 승완의 목소리에 예림은 뒷문으로 달려나갔다. 선생님의 뒷모습에 배꼽인사하는 승완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
"아, 예림아."
이름을 불러놓고선 또 예쁘게 웃는다. 이 사람은 자기가 예쁜 거 알고 있는게 분명하다. 예림은 아찔해지는 기분에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놀란 승완이 후다닥 예림에게로 다가와 부축했다.
"왜 그래, 괜찮아?"
"네에. 그냥, 피곤해서. 괜찮아요."
예림은 아픈 척을 한 것 같아 부끄러워져 승완을 살짝 밀어냈다. 승완과 가까이 있을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진짜로 아파질 것 같았다. 승완은 예림이 미는 대로 밀려나면서도 예림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선배, 그런데 여기는 왜..."
예림의 물음에 승완은 이유를 생각하지 않은 듯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데굴 굴렸다.
"어, 음... 같이 매점 가려고?"
"진짜 그것 때문에 왔어요?"
예림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하자, 승완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아니, 사실 보고싶어서 왔어."
예상하지 못한 승완의 돌직구에 예림은 입을 헤 벌렸다. 사랑에 빠진 승완의 성격은 이렇구나. 예림은 승완의 손에 이끌려 매점을 향하며 멍하니 생각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앞서가는 승완의 옆얼굴을 힐긋 올려보자, 말간 얼굴에 귀와 볼은 사랑스러운 핑크 빛으로 물들이고 입술은 행복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승완의 얼굴을 이런 모습이구나. 평소의 온화한 표정과는 또 다른, 행복한 표정이었다. 예림은 간질간질한 기분에 괜히 고개를 휙 돌렸다. 승완과 예림은 학생들로 복작거리는 매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서 얼른 나왔다. 그리고 매점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아 나눠먹었다.
"선배, 오늘 아침에 괜찮았어요? 거의 종 치기 직전에 들어갔잖아요."
"음... 담임 선생님이 좀 놀라긴 하셨지. 왜 이제 오냐고."
조금이 아닐 것 같은데요, 라고 예림이 대꾸하자 그래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승완은 웃으며 말했다. 지각할 뻔 한 것이 뭐가 좋다고 웃는지, 예림은 마냥 맑게 개인 승완을 보고는 같이 웃어버렸다.
"선배, 이번 주 주말에 약속 있어요?"
"특별한 약속은 없는데."
"그럼, 나랑 영화 볼래요?"
예림은 떨리는 목소리로 승완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동안 승완과 같이 논 적은 없어서 말하면서도 혹시 승완이 거절하면 어쩌나, 영화를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응, 좋아."
승완은 예림의 걱정이 무색하게 단번에 승낙했다. 종 칠 때가 다 되었다며 승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예림을 일으켰다. 승완과 헤어져 교실로 들어온 예림은 주말 데이트 계획을 세우느라 수업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수업 진도와는 다른 페이지를 펼쳐 놓고 실실 웃으며 연신 무언가를 끄적이는 예림을 보며 예림의 짝궁은 드디어 쟤가 미쳤다고 진저리를 쳤다. 남이 어떻든 예림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의 어느 누군가보다도 행복했다. 마녀님, 감사합니다!
어느 새 시간이 흘러 쿠키의 제조일자로부터 5일째, 토요일이 되었다. 예림은 새벽같이 일어나 옷장을 엎어가며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또 이 옷은 너무 신경쓴 것 같고, 저 옷은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예림은 엄마의 사랑이 담긴 손길로 등짝을 한 대 맞고 나서야 겨우 옷을 골랐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린팅이 있는 하얀 티셔츠에 블랙진, 품이 큰 베이지색 가디건엔 팔도 꿰지 못하고 걸치기만 한 채로 후다닥 뛰어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고 마지막 점검을 마친 예림은 오늘 잘 하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승완과 만나기로 한 버스정류장까지 달려간 예림은 먼저 도착해있는 승완을 발견했다.
"선배!"
"아, 예림아. 왔어?"
승완은 잔꽃무늬가 들어간 베이지색 원피스에 하얀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무늬나 채도는 다르지만 메인 컬러가 같아서 마치 커플룩처럼 보이는 모습에 예림은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오늘 유난히 햇빛이 강한 것 같지만, 더워서 녹아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가디건은 절대 벗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승완과 예림은 곧이어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시내에서 내렸다. 분위기 좋은 파스타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영화 시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거리를 걸었다. 길 옆 가게의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힐긋 본 예림은 마치 커플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뭇내 흐뭇했다. 사실 예림은 오늘 선배한테 고백할까,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미리 알아 둔 카페를 갔다가, 벚꽃이 많이 핀 공원에 데려가서 고백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예림은 이때까지만 해도 희망적이었다.
승완과 함께 본 영화를 고른 이유는 요즘 상영하는 로맨스 영화가 그것밖에 없는 탓이었다. 영화 자체는 클리셰 가득한 평범한 멜로영화였다. 그런데 여주인공의 연적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주인공과 상대방이 마음을 확인한 후 이어지려고 하자, 남주인공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는 남주인공이 자력으로 최면을 풀고 여주인공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스토리의 영화였다... 예림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의식적으로 쿠키의 마법이 풀리는 날짜를 세고는 있었지만, 승완과 보낸 시간이 너무 달콤한 나머지 모든 게 마법의 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저가 아무리 진심이어도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고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마음을 얻는건 치졸한 거였다. 예림은 그만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영화가 끝나고, 승완의 얼굴을 마주하기 부끄러워 더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선배. 저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요... 이만 집에 가야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니야, 내가 못알아줘서 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줄게."
"...알겠어요."
바보같은 승완은 예림이 자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예림을 걱정한다. 예림은 울고싶은 기분이었다.
쿠키의 제조일자부터 딱 7일째 되는,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예림은 토요일에 승완과 헤어지고 난 후, 어떻게 할지 주말내내 고민했다. 승완에게 고백해서 사귄다고 한들 마법이 풀려 승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되면, 마음없이 사귀는 게 더 비참할 것 같았다. 예림이 내린 결론은 고백은 하지 말고 마법이 풀리는 마지막 날까지 승완과 함께하며 추억을 만드는 거였다. 그게 예림 혼자만 소중한 추억이라도. 예림과 승완은 지난 일주일처럼 함께 등교하고, 예림의 교실이 있는 층에서 헤어졌다. 쉬는 시간에 같이 매점을 가고, 점심 시간에 학교 구석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따뜻한 봄날의 풍경 사이로 햇빛을 받으며 제 옆에 앉아 웃고 있다가 살짝 불어온 바람에 무심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승완이 참을 수 없이 예뻤다. 구름 한 점까지도 완벽한 눈앞의 풍경에 예림은 숨이 멎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속에 갖혀 영원을 살고 싶었다. 예림은 갑자기 울컥 치솟는 마음에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승완이 예림의 물기 어린 눈을 보고는 눈에 뭐가 들어갔냐고 물으며 예림에게 가까이 몸을 숙이자, 예림은 괜찮다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선배, 그만 들어가요. 종 치겠다."
예림은 승완의 손을 잡아 일으켜 교실로 돌아갔다. 오후 수업을 듣고 종례까지 마친 후 먼저 끝난 예림은 승완의 반 앞에서 승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곧 승완이 친구들과 함께 나오자 예림은 몸을 일으켜 승완에게 손을 흔들었다. 웃으며 다다다 달려오는 승완은 큰 대형견 같아 귀여웠다. 승완은 두 사람을 보며 엉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예림 앞에 멈춰섰다.
"집에 가요."
"응, 예림아. 손... 잡아도 돼?"
예림은 꼬물거리는 승완의 손을 보고는 먼저 다가가 승완의 손끝을 잡았다. 씩 웃는 예림의 표정을 살핀 승완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예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웃었네. 다행이다."
승완은 표정이 하루종일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어. 라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토요일에도 그렇게 헤어졌으니 걱정했을 것이다. 예림은 자신 때문에 승완이 하루종일 눈치를 봤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표정을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예림과 승완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항상 함께 걷던 하굣길을 걸었다. 딱 일주일 전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였다. 목련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대신 복사꽃이 방울방울 피어오르는 풍경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넘실거리고, 구름에 해는 가려졌지만 대신 낮달이 떠 있었다. 붉은 노을빛이 아닌 보랏빛으로 하늘이 물들고 있었다. 예림은 마지막 날, 승완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려 애썼다. 눈을 부릅떠 풍경을 하나하나 살피고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귀로는 하교하는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 작은 새의 샛소리, 저 멀리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와 자전거가 따릉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그럽게 빛나는 승완을 눈에 담았다. 어깨에 걸릴 듯 말 듯한 흑색 단발과 단정히 멘 넥타이. 복사뼈 위로 올라오는 하얀 양말에 감색 스니커즈를 신었구나. 자신만을 위해 웃어주는 눈빛은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울컥하고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항상 헤어지던 곳인 예림의 집 앞에 다다랐어도 말없이 승완만 바라보는 예림을 보고, 승완도 잠시 예림을 기다려 주었다.
"선배. 집에 가야죠."
"응. 갈게, 내일 보자."
마침내 예림이 승완에게 인사하자, 승완은 평소처럼 인사하고 미련없이 돌아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승완의 입장에서는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일 테니까, 당연한 행동이었다.
"선배, 안녕. 잘 가요."
예림은 승완의 뒷모습에 대고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승완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예림의 눈에서 눈물이 툭 터졌다. 예림은 손등으로 눈을 벅벅 닦고 집으로 들어와 방에 처박혔다. 일주일 동안 예림은 정말 꿈결같은 시간을 보냈다. 행복했던 만큼 끝은 아팠다. 다짐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마법에서 깨는 것이 승완이 아닌 자신인 것 같았다. 승완이 7일간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굴었던 행동들은 전부다 승완의 진심이 아니라 마법의 힘이었다.
"아 미쳤나 봐..."
예림은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상처받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애초에, 마법의 힘 따위 믿는 게 아니었다. 편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나만 힘들고 상처받을 게 분명한 짝사랑은 하는 게 아니었다. 승완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방금 했던 말은 취소다. 승완을 좋아하지 않는 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가슴 한 쪽이 따끔거리듯 아팠다. 승완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는 게 큰 잘못처럼 여겨졌다.
[선배. 내일부터 우리 학교 따로 가요.]
예림은 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들어 승완의 연락처를 눌러 문자메세지를 입력했다. 손이 미끄러져 자꾸만 오타가 나서, 한 문장을 완성하는데 아주 오래 걸렸다.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승완의 성격 상 내키지 않아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에 예림은 승완에게 연락했다. 승완의 곤란한 표정을 볼 바에, 자신이 먼저 승완을 끊어내기로 했다. 몇 주 정도 피해다니면 괜찮을 것이다. 그 후에 다시 아는 척을 하면 조금, 아니 많이 어색하겠지만 또 아예 관계를 끝내기는 싫었다. 고작 어색함을 참지 못해 승완의 미소를 영원히 못 볼 수는 없었다. 예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사회 생활을 하더라도 승완과 간간히 연락하며 지내는 아는 언니 동생 사이로 남고 싶었다. 나아중에, 승완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뭐에 씌였는지 갑자기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좋아했었나? 하고 승완이 하하 웃으면, 그게 뭐냐고 타박하며 저는 그때 선배 좋아했는데, 몰랐죠?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예림은 훌쩍이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답신이 긍정이건, 의문이건 간에 보고싶지 않아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예림은 옷도 안 갈아입고 저녁도 거른 채 베개를 껴안고 울다가 지쳐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날 학교에서도 예림은 승완을 피해 다녔다. 승완을 마주칠 것 같으면 길을 돌아갔다. 저 멀리서 승완이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예림은 외면했다. 아무리 마법 때문이지만 일주일 간 징하게 붙어다녔던 친구가 갑자기 모르는 척 하면 승완도 상처받겠지. 아니면 예림을 좋아하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없어져서 지난 일주일동안의 행동이 부끄러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승완과 대화하게 된다면 제발 나 좀 좋아해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릴 것 같았다. 예림은 며칠간 철저하게 승완을 피했다. 중간에 학생회 회의가 있었지만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 승완과 친한 사이의 친구들까지도 다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일주일을 보냈다.
[예림아.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오늘 학교 끝나고 5시 30분에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릴게.]
승완을 피한 지 일주일 째, 승완에게서 온 문자였다. 그 전에도 문자는 몇 통 더 왔었지만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은 처음이었다. 5교시가 끝나고 핸드폰을 꺼냈다가 문자를 확인한 예림은 문자메세지 창을 한참을 응시했다가 답장을 보내지 않고 화면을 껐다. 문자를 무시하는 건 미안했지만 승완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감정 정리가 덜 됐다. 그것보다 보낸 시간이 수업 중일 시간 아닌가? 선배답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수업시간에 그대로 잠든 예림은 종례 시간이 다 돼서야 일어났다. 예림은 가방을 대충 챙겨 교실을 나섰다.
"김예림, 너 나랑 얘기좀 할래?"
뜻밖에 예림에게 말을 걸어온건 부회장이었다. 퀭한 얼굴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집에 가던 예림의 앞을 부회장이 가로막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난 얼굴이었다.
"나 피곤해. 너랑 할 얘기 없으니까 가라."
예림은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고는 부회장을 지나쳐 걸어갔다.
"너, 승완 선배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선배한테 무슨 짓을 한건데!"
부회장은 예림의 뒤에서 빽 소리를 질렀다. 예림은 우뚝 멈췄다가 뒤를 돌아봤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예림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하기는! 너랑 갑자기 따로 다니길래 좋아했는데... 선배는 내내 우울한 얼굴이고, 학생회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나 오늘 그 선배 보건실 가는 거 처음 봤잖아."
"뭐? 선배 아파? 어디가?"
"선배 아픈 줄도 몰랐니? 몸살감기래. 아까 점심먹고 보건실 갔다가 일찍 조퇴했어."
예림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서 부회장 앞으로 다가오자 부회장은 쯧쯧거리며 예림에게 눈을 흘겼다.
"...그게 왜 나 때문이라는 건데."
"너랑 맨날 같이 다니다가 따로 다니자마자 계속 그런 상태던데, 너 때문이겠지. 나까지 피해 다니는 거 보면 무슨 짓을 해도 크게 했어, 응?"
대판 싸웠니? 말을 해보란 말야. 부회장은 예림을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며 타박했다. 자신만 힘들어 할 줄 알았는데. 예림은 승완이 그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어서 당황했다. 부회장은 예림의 반응을 살피더니 대뜸 질문했다.
"너, 선배랑 사귀어?"
"뭐어? 절대 아니야."
"그럼 그동안 왜 붙어다녔던 거야? 갑작스럽게."
예림은 할 말이 없어 웅얼거렸다. 마법의 쿠키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부회장은 우물거리는 예림을 보고 이런 애 때문에 내가 마음고생했다니, 라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쿠키까지 구해다 준 건 난데..."
예림은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서 있던 와중에 부회장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쿠키?"
"어?"
"방금 쿠키라고 했잖아."
"쿠키가 뭐가 어때서?"
아 진짜, 예림은 답답한 반응에 부회장을 채근했다.
"하트 모양. 빨간 색. 유리 병..."
"잠깐,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예림이 하나씩 읊어대는 쿠키의 자세한 모양새에 부회장은 예림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승완이 쿠키를 받았을 때 반응이 묘했던 게 기억난다. 화이트데이 때 부회장이 준 쇼핑백이 그 쿠키였나 보다. 같은 쿠키를 받아서 그랬던 거구나. 그러다 예림은 벼락같이 쿠키와 함께 왔던 카드에 적힌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한 항마력을 지닌 사랍이 섭취할 경우 효과가 없거나 미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환불이나 반품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한 번 각인이 된 후에는 일주일 동안 다른 사람을 보고 쿠키를 섭취해도 각인이 풀리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예림은 떠오르는 한 가지 가설에 경악했다. 말도 안 되지만, 부회장에게 먼저 마법 쿠키를 받은 승완이 부회장이 아닌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일이 설명이 되는 것은 이것 밖에 없었다.
"몰라도 돼. 나 먼저 간다!"
예림은 자신을 잡고 있던 부회장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그자리에 남은 부회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예림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예림이 달려가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부회장과 대화하다가 벌써 5시 45분이 넘었다. 선배가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던 시간이 5시 30분이었다. 시간을 왜이렇게 빨리 잡았어! 자신이 집에 들어가면 안 나올 걸 알았으니까 집에 올 시간 즈음에 맞춰 집 앞에 서있다가 마주치려던 심산이었겠지. 귀여운 속셈에 예림은 헛웃음을 지었다. 집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6시 넘어 도착할 것 같았다. 그사이에 지쳐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지, 아직 저녁에는 쌀쌀한데 아프다는 사람이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예림은 복잡한 마음을 담고 속도를 높였다. 예림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저 멀리 승완이 보였다. 예림이 사는 아파트 입구의 계단 난간에 걸터 앉아있는 승완은 조퇴했다면서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승완도 계속 예림이 올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예림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림은 승완의 앞까지 달려와 무릎을 짚고 헉헉거렸다. 너무 달린 나머지 어지럽고 목도 탔지만 예림은 승완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예림아, 왜 이렇게 뛰어왔어... 천천히 와도 되는데."
"지금 시간이, (예림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인데 어떻게 안 뛰어와요. 선배 가버릴까봐 달려왔어요."
"나는 계속 기다리려고 했어. 네가 먼저 와서 집에 들어갔을까봐 걱정했는데."
예림은 숨을 고르고 몸을 바로 폈다. 며칠 만이지만 그동안 열심히 피해다닌 덕에 승완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예림이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하는 중, 승완이 예림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예림아.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네?"
"너 기분 안 좋아보였던 날, 나한테 갑자기 문자로 따로 가자고 했잖아. 그 다음날부터 계속 나 피하고. 아니다, 토요일부터 상태 안 좋았잖아. 토요일 날 내가 뭐 실수했어?"
승완이 속사포로 쏟아내는 물음에 예림은 조금 놀랐다. 자신이 승완과 거리를 두던 날동안 승완은 이런 생각으로 괴로워했겠구나, 싶어서 미한한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선배 잘못 하나도 없어요. 다 제가 이기적으로 굴었던 거에요. 미안해요."
예림은 이어서 승완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선배. 혹시, 화이트데이 때요."
"응."
"부회장한테 제가 준 거랑 같은 쿠키 받았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승완은 눈을 껌뻑거리며 예림에게 되물었다.
"그거, 부회장 앞에서 먹었어요?"
"응. 먹으라고 해서..."
"어땠어요? 뭐 이상하지 않았어요?"
예림은 마음이 급해졌다.
"음, 아니? 그냥 맛있었는데."
그러다 승완은 무언갈 깨달은 얼굴을 하고는 예림에게 파드득 이야기했다.
"혹시, 부회장이 화이트데이 때 나한테 고백한거, 말한거야? 그것 때문에 나 피했어?"
"네? 선배, 부회장한테 고백받았어요?!"
고백까지 했다니, 걔는 진짜 나쁜 애였다! 쿠키의 마법이 제대로 선배한테 먹혔다면 그대로 선배랑 사귈 생각이었어? 예림은 기가 차서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승완이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을 지었다. 고백은 확실히 거절했다고 변명을 덧붙였다. 예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화이트데이 다음날 아침에 나 기다리던거, 그 후에 나랑 같이 다니던거... 왜 그랬어요?"
이제 마지막이었다. 오해는 풀었지만 승완이 예림에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확실히 해야 했다.
"예림이 네가... 나한테 화이트데이 선물 줬잖아."
예림이 대답 없이 승완을 바라보자, 승완은 말을 이었다.
"그 쿠키 단지 안에, 'I love you' 라고 적힌 쪽지 보고..."
예림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속으로 펄쩍 뛰었다. 그 방부제같던 뭔가가 쪽지였나 보다!
"우리 썸 타는 거 아니었어?"
마지막 문장을 맺는 승완의 목소리는 처량하기까지 했다. 커다란 귀를 단 대형견이 귀를 축 늘어뜨리며 예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승완의 눈빛에, 예림은 긴장이 탁 풀렸다. 승완을 보려고 집까지 뛰어오는 내내 마음속으로 정리했던 가설이 사실이었다. 승완은 항마력인지 뭔지가 높은 사람이라 쿠키를 먹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거다. 승완은 마법의 힘이 아닌, 오롯이 승완의 마음만으로 자신을 좋아해줬던 것이다. 화이트데이 선물에 원래 들어있었음직한 통상적인 쪽지를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예림은 지레 겁먹고 승완에게 상처입혔다.
"선배, 있잖아요."
"응, 예림아."
"저 선배 좋아해요. 그 쪽지 제가 쓴 거 아녜요. 그러니까, 이게 진짜 고백이에요."
"나도... 많이 좋아해 예림아."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승완도 긴장이 풀렸는지 휘청였다. 예림은 재빠르게 승완을 안았다가 몸이 불덩이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파서 조퇴한 사람을 너무 오래 밖에 두었다. 예림이 잔뜩 울상지으며 약은 먹었냐고, 몸 챙기라고 타박하는데도 승완은 좋다고 헤헤 웃었다.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건가?"
"선배는 그런 걸 말로 해야 알아요?"
"미안해. 연애는 서툴러서..."
"선배는 뭐든지 다 능숙한 줄 알았는데."
예림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대꾸했다. 어쨌든 아픈 승완을 계속 밖에 세워둘 수가 없어서 예림은 승완을 집에 데려다준다며 승완이 항상 떠나던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더 놀라웠다.
"사실 우리 집 이쪽 아닌데..."
"네? 선배 항상 이쪽으로 갔잖아요. 우리 집에서 더 가야 한다고."
"...너랑 더 얘기하고 싶어서 그랬어. 우리 집이 학교랑 더 가까워."
예림은 황당해서 승완을 바라봤다. 선배랑 알게 된 후로 내내, 승완의 집이 반대쪽인 줄로만 알았다.
"예림이, 너 좋아한 지 오래 됐어. 네가 먼저 화이트데이 때 선물 줘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데. 갑자기 피하기나 하고... 나빴어."
원래의 승완도 그랬지만 아파서 열이 오른 승완은 더 못하는 말이 없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심경을 토로하는 승완의 모습에 예림은 펄쩍 뛰었다.
"선배, 저 좋아했어요!?"
덕분에 예림만 꿈이야 생시야를 외치며 일년 치 놀랄 일을 다 겪는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승완을 집까지 데려다 준 예림은 승완에게 우리 사귀는 거 맞다, 꿈 아니고 내일은 내가 선배네 집 앞으로 올거다. 하고 맹세하고서야 집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예림은 집으로 돌아오며 나야말로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내가 선배에게 화이트데이 선물을 주고, 선배랑 일주일간 썸을 타다가 오해가 있어서 선배를 피했고...
"어, 그러고 보니 선배를 왜... 피했지?"
예림은 무언가를 잊었다. 그것도 선배와 자신을 이어 준, 그리고 선배의 마음을 오해하게 만든, 중요한 무언가를. 그러나 곧이어 예림은 그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은 행복하다. 예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멀어져가는 예림의 뒤에서 조용한 그림자가 나와 웃으며 제 갈길을 갔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와 떨어진 명함 한 장만이 누군가 있었던 사실을 증명했다.
명함엔 다른 정보 없이 오직 #Cookie Jar 가 양각되어,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