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잎
감자
*
바니바니 바니바니 당근, 당근, 당근, 당근 아 김예림 뭐 하냐! 등 딱 대 이리 와. 마셔 마셔. 아 저 그러게 이거 잘 못한다고 했, 아, 아 아파.. 하늘에서 내려온 토끼가 하는 말!
저 바람 좀 쐬고 오겠슴다. 어 그래 다녀와! 바니바니 바니바니,
와 오티가 원래 이런 거였나? 슬슬 머리가 좀 아프다. 나는 나오는 길에 챙겨 온 생수를 깠다. 이젠 물병 안에서도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겨우 두어 달 전만 해도 아빠랑 같이 마시면서 꽤 술에 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저 먼 산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티 가서는 무조건 웃고만 있으라느니 극단적인 조언을 들었던 것 치곤 나름 재밌고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오티라길래 잔뜩 쫄아붙어서는 나 하나 때문에 얼차려 당하고 신입생 집합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옷도 최대한 구린 트레이닝복 정도로만 입었는데 생각보다 그리 크게 걱정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집에서 괜히 호박고구마 성대모사 연습했네. 여명 마시면 집합한다는 얘긴 누가 한 거야 대체..
날이 꽤 춥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이 안 온다는 점이다. 나는 남들이 볼 때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지만 계절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계절감이 드러나게 되는 자연환경이 싫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싫은 건 봄의 벚꽃이랑 가을의 낙엽이다. 괜히 나뭇잎 물든 거 보고 이 때다 싶어 감성충이 되는 사람들이 좀 우습기도 하고.. 왜 벚꽃 좀 예쁘게 피었다고 본인들도 예쁘게 연애하고 싶고, 낙엽 좀 굴러다닌다고 본인들도 아련한 척 하며 낙심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또 봄이라고 벚꽃 필 텐데 그것 마저 별로다. 또 세상이 화사한 파스텔 톤으로 물들 걸 생각하면 술 때문에 아팠던 머리가 더 아파온다.
그냥 남들 다 벚꽃놀이 가고 단풍놀이 갈 때 시험공부한다고 어디 못 갔던 내 중고등학생 시절 때문에 심통나서 이러는 걸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바뀌는 게 싫었다. 그냥 한 해 내내 적당한 온도에 알맞은 습도 유지하면 얼마나 좋아. 근데 어디 가서 이런 말 하면 항상 우리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해서 벌레들이 작은 거라는 소리 들으며 바보 취급 받더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오늘 하늘에 구름 많이 꼈다. 별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그제야 내 뺨과 손을 찔러오는 늦겨울의 바람이 못 견디게 차가운 걸 인지했다. 분명 얼굴 엄청 빨개졌을 거다. 코트는 봄이 되면 꺼낼 걸 그랬다. 이렇게 몸이 시릴 줄 알았으면 롱패딩 입고 왔을텐데. 얼른 들어가서 술 퍼마시다 제 몸 못 가누는 애들 사지 붙잡고 방에 데려다 놓는 일이나 도와야겠다. 들고 있는 생수만 다 마시고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작고 하얀 게 땅에 내려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눈. 땅 얼면 집에 가기 힘들 텐데 빙판길에서 안 넘어지겠다고 종종걸음으로 걸어 갈 모습을 생각하면 짜증이 절로 난다. 괜히 생수병에 화풀이를 하듯 아까 다 마신 생수병을 발로 퍽 찼다. 생수병이 멀리 굴러가는 꼴이 길에 쓰레기를 막 버린 것에 대해 내 양심을 쿡쿡 찔러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기껏 찬 생수병을 다시 주워서 쓰레기통을 찾았다. 쓰레기통에 아무 생각 없이 생수병을 던져놓은 채로 안에 슬슬 들어가려는데 나는 건물 문 앞에 다다라서야 내가 생수병을 아직도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야, 뭐지?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던졌는데 생수병이 아직 내 손에 들려있다. 주머니를 뒤져봤더니 보조배터리와 지갑 뿐이다. 설마 나 핸드폰 갖다 버렸나? 나는 아까 그 쓰레기통이 있던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쓰레기 버리려다 핸드폰 버린다는 거 남 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걸 기어이 내가 해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아무 생각 없이 웃어댔던 과거의 내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쓰레기통 앞에 다다랐지만 꽤 늦은 시간이라서 어두운 데다 주변에 가로등도 없어서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쓰레기통이 꽤 큰 데다 뚜껑이 달려서 열기 편한 형식도 아니고 입구는 폭이 좁고 안은 넓은 형식으로 생겨서 거의 한 번 넣으면 도로 빼지 말라는 의도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라리 빛을 비출 만한 것이라도 있으면 안을 비춰보고 나무젓가락이라도 가져와 어떻게든 빼내보겠는데 팔을 넣어 아무렇게나 손을 휘저어봐도 아무 것도 잡히질 않으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건물에 도로 들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학생회한테 손전등이나 다른 핸드폰을 빌려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좋은 냄새가 나서 화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기도 하다. 향이 짙어진다. 여기로 다가오는 건가? 하지만 좋은 향보다는 지금 쓰레기 더미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될 지도 모르는 내 휴대폰이 더 급하다보니 다시 쓰레기통에 팔을 집어넣었다. 한참을 쓰레기통과 씨름하고 있는데 옆으로 누가 다가왔다.
"뭐하고 계세요?"
아까 그 향의 주인인 것 같았다. 어딘가 엄숙한 느낌이 드는 향이어서 향수를 뿌린 사람은 적어도 서른은 넘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나랑 또래처럼 보였다. 위로 많아봐야 서너 살 차이 날 것 같은 코트를 입은 단발의 여자였다. 나는 도와달라는 티를 내려고 부러 쓰레기통을 툭툭 건드렸다.
"제가.. 여기 핸드폰을 버려서요."
"아, 어쩌다가.."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나는 최대한 불쌍한 톤으로 말했다. 세상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눈썹도 축 내렸다. 그 사람은 내 얼굴과 쓰레기통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드릴까요?"
"아 네네 진짜 감사합니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걸 보니 우리 학교 선배는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티를 오기 전 같은 수련원을 다른 학교 하나와 같이 쓰고 있으니 괜한 싸움이 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술을 같이 마신다던가 하는 상황은 제발 만들지 말고 가급적이면 대화 조차도 웬만해선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 손전등을 켠 채로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메고 있던 메신저백에서 드럼 스틱을 꺼냈다. 드럼 스틱을 집게 삼아 쓰레기통 안에 넣어 핸드폰을 빼내는 모습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이 사람일까 싶었다. 후광까지 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해요. 저 사례할 테니까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사례는 무슨 사례예요. 이런 걸 가지고. 괜찮아요. 저 아니어도 누가 도와드렸을 거예요."
"제가 정말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손사래를 치는 그를 어떻게든 부추겨서 번호를 얻어냈다. 나는 그를 어떻게 저장할 지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저기."
"네?"
"드럼 치세요?"
"아, 아니요. 어.. 친구, 친구 거예요."
"그럼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 지 여쭤봐도 될까요."
"승완이요. 손승완."
혹여 알아듣지 못할까봐 한 번 더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는 그를 어떻게 저장할 지 머뭇거렸다. 그냥 이름만 적기엔 좀 이상해서 뒤에 님이라는 존칭을 붙이긴 했는데 이것도 썩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뒤에 괄호를 열고 사례해야 할 분이라고 적었다.
"핸드폰 작동 잘 돼요?"
"아 네네, 덕분에 잘 되네요."
"다행이네요. 이제 들어가요."
그 분과 같이 돌아가는 길에 여러 얘기를 나눴다. 그 분은 다른 대학에서 오신 분이 맞았다. 3학년인데 학생회가 아니어서 오티에 오지 않으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오게 돼서 나처럼 술 마시다 잠깐 나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분이 다른 건물로 들어가자 다시 꾸벅 인사했다. 저 학교 부럽다. 우리 학교에도 저런 선배 계셨으면 학교에서 살 수도 있을 텐데.
평소 같았으면 이런 일이 있다면 내 성격 상 사례를 했으면 했지 번호 주기 싫다는 사람을 구태여 부추겨서 번호를 받아내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었겠지…….
그냥 뭔가, 지금 다시 만남을 기약하지 않으면 그 분을 다시는 못 만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티 장소가 겹칠 정도면 학교가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다는 뜻이니 어쩌다 마주칠 수는 있었겠지만 솔직히 그러기 쉽지 않기도 하고 뭔가 꼭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좋은 향 나고 착한 사람 번호 따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을까?
나는 오티가 끝나자마자 그 분께 연락했다. 대충 밥 사고 싶은데 혹시 언제쯤 시간 되시냐는 내용이었다. 정말 진부한 내용이지만 손에 땀까지 쥐어 가며 어떻게 보내야할 지 고민해서 보냈다. 참, 나 같아도 부담스러울 것 같다. 다짜고짜 밥을 사주겠다니.
'밥을 사신다구요..? 괜찮아요 그냥 그 일은 잊으셔도 되는데'
보냈던 연락에 답장이 와서 보니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다. 보통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이 밥을 사겠다 하면 그 호의가 크든 작든 응하지 않나? 나만 그런가? 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혹시 내가 싫어서 만나기 싫단 걸 돌려 말하고 계신 거면 어쩌지.
'아뇨아뇨 사양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때 선생님 안 계셨으면 저 아직도 쓰레기통 뒤지고 있었을 걸요'
'제가 진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제가 그 일을 어떻게 잊어요 ㅜㅜ'
밥을 사준다는 입장에서 밥 좀 같이 먹어달라 애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계속 이러는 것도 실례인가..? 딱 한 번만 더 권하고 그 때도 괜찮다고 하면 그냥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사드려도 부족할 것 같은데'
'그럼 밥 말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어요?'
'네? 뭔데요??'
뭐지, 그렇게 완벽해보였던 사람이 나한테 할 부탁이 뭘까. 과제라도 대신 해 달라는 건가? 물론 그런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분이라면 나 보고 한 달 간 빵셔틀을 하래도 생각은 해보겠다.
'제가 밴드를 하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저희 노래 좀 들어주실래요?'
'아 당근빠따죠 영광이네요'
'밴드 이름 알려주세요 유튜브부터 멜론까지 전부 섭렵할게요'
승완 씨는 밴드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체리블라썸. 잘 어울린다. 좀 뻔뻔하긴 해도 내가 계절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단 벚꽃이 예쁜 건 사실이니까. 그 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이트들을 계속 뒤져 본 결과 곡이 4곡이 실려있는 앨범 하나를 재작년에 내셨고, 유튜브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영상이 올라오고있다는 걸 알아냈다. 앨범에서 두 번째로 수록된 곡은 베이스가 주가 되는 바운스 펑크 스타일의 곡이었다. 마치 연한 조명이 켜진 바에서 나를 위해서만 곡을 연주해주고 있는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밴드의 이름은 체리블라썸, 하나 뿐인 앨범의 타이틀곡의 제목은 봄인가 봐. 분명 내가 싫어서 치를 떨었을 것들이 전부 모여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이라곤 전혀 안 들었다. 앨범의 전곡이 다 너무 좋았다. 특히 가사가. 그런데 대체 왜 앨범의 좋아요 수가 팔십 언저리인 걸까. 대체 왜.
급하게 유튜브를 들어가 보았다. 구독자 수 37명. 제일 조회 수가 높은 영상의 조회 수가 1천 회. 분명 그 분의 뒷모습 뿐인 4분짜리 팝송 커버 영상은 내 입을 못 다물게 하기 충분했음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다. 내가 그 분에게 가지고 있는 호감 같은 걸 다 빼고 들어도 현직 가수들 뺨은 가볍게 후려 칠 목소리였다. 올라 온 영상들을 보니 마지막으로 공연을 했을 때가 7개월 전이었다. 나는 노트북으로 몇 시간을 유튜브 영상을 돌려 보았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스밍해달라고 할 때도 두어 번 하고 말았는데 지금은 제대로 재생이 되나 안 되나까지 계속 확인해가며 앨범의 그 4곡을 반복재생하고 있었다. 나로는 당연히 부족하겠지만 어떻게든 차트 순위를 조금이라도 올려주고 싶었다.
나오자마자 차트를 뒤집을 만도 한 노래들이 좋아요 수가 겨우 이 정도라서 당황스러웠다. 나는 왜 이 노래를 재작년에 듣지 못했을까. 정말 말 그대로 나만 듣고 싶은 노래들이라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한테까지 노래를 들어달라는 부탁을 하실 정도였다면 밴드와 노래를 정말 많이 아끼고 계신다는 의미일 텐데 이걸 나만 알고 있기엔 너무 죄송하잖아. 나는 곧바로 친한 친구들에게 노래들을 공유했다. 이 노래를 듣고 물이 와인으로 변했다느니 여러 주접을 더한 메세지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노래를 한 번 들어보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노래를 틀어놓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계속 곱씹으며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일찍 잠에 들었다. 그 날은 정말 개운하게 잠을 청했다. 그 분의 음색에는 사람이 안정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꿈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은 잠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제일 먼저 승완 씨에게 연락했다. 노래 너무 잘 들었다고, 틀어놓고 잤는데 정말 개운하게 잤다고 말이다. 승완 씨는 고맙다면서 이모티콘으로 답했다. 나는 신나서 다른 친구들에게 노래를 공유했던 메세지 화면을 캡쳐해 보내면서 가사도 너무 와 닿았고 좋아서 눈물이 안 멈춘다는 뉘앙스의 말들을 넣어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금방 돌아온 답장에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얼마 없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이 있었다. 괜히 마음이 동했다. 너무 진심인 것 같아서. 나는 혼자 승부욕이 들었다. 이 노래가 어떻게든 성공했으면 좋겠다. 아예 포털 사이트에까지 노래를 계속 공유하고 있는데 승완 씨에게 메세지가 왔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만든 다른 노래들도 들어주실 수 있어요?'
'헐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오늘 시간 되세요?'
이런 가수의 노래를 듣게 되다니 설레다 못해 황홀해서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이전 대화를 올려다보며 핸드폰 케이스를 톡톡 두드리고 있던 중, 답장이 왔다.
'네 오늘 괜찮아요'
*
엄마가 봤다면 웬 주접이냐고 깔깔 웃었을 정도로.. 차려 입었다. 내가 봐도 좀 지나친 것 같긴 하지만 가수를 만나러 가는 건데 맨투맨에 청바지? 말도 안 된다. 결혼식에 입고 갈 것 같은 옷을 입고 승완 씨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했다. 주소를 찍어주신 걸 보니 그냥 승완 씨의 집을 알려주신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가서 빌라에 들어섰다. 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승완 씨가 조금 후줄근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 제가 너무 편하게.. 입었나요?"
막 씻고 나온 듯 물기를 머금은 피부에는 트레이닝복이 걸쳐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했다. 문을 주춤 열고 들어간 집 안에는 통기타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악보 더미와 여러 음악 장르의 이름이 쓰여진 유에스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멋지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과생인 나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원소 기호나 수학 공식 같은 걸 프린트하고 다 정리해서 집 곳곳에 붙여놓고 한 뭉텅이씩 모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거 아닌가. 자신의 직업에 저렇게 충실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문자 메세지를 통한 노래에 대한 칭찬을 보고 내게 곧바로 자작곡을 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에 비추어 보면 그는 정말 그의 꿈도, 노래도 참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래 정말 좋아요. 작사작곡도 다 직접 하셨잖아요. 아직 3학년이신 거면 저랑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시는 건데 진짜 멋져요."
"고마워요. 휴학을 2년을 해서.. 이제 스물넷이네요."
나는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귀가 삐었는지 왜 이런 노래를 차트 1위에 안착시키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넌 봄이 돼줘 항상 나는 꽃이 될게, 서로를 녹여주고 열리게 해주면 좋겠다. 그 가사 진짜 예쁜 시 한 편 같아요. 저 여기 오면서도 그거 들었어요. 곧 있으면 벚꽃도 피잖아요. 그 때 들으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원래 계절 바뀌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어? 어, 괜찮으세요?
혼자 재잘거리다 승완 씨의 얼굴을 보았는데 눈물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놀란 나는 곧바로 가져 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작은 티슈가 잡혔다. 그것을 내밀고 나서 우리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아, 죄송합니다.."
눈물을 애써 삼키는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안쓰럽게까지 느껴져서 등을 조심스레 토닥여주었다. 눈물을 생각보다 금방 그친 그는 내게 다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 노래에 그렇게 말해주시는 분이 없었거든요."
"여태 한 번도요?"
"네, 제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같은 밴드 사람들 조차 많이 회의감을 느끼더라구요. 밴드에.."
다시 정적이 흐른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 지 몰라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먼저 정적을 깬 건 승완 씨였다.
"사실, 제가 처음에 저희 노래를 들어달라고 부탁 드린 것도 별 뜻 없었어요. 그냥 밥 사달라는 것 대신 꽤 그럴 듯한 게 그것 밖에 안 떠올랐었는데 이렇게 좋은 말들 많이 해 주시니까.. 너무 기쁘더라구요."
"…노래 정말 좋던데요."
"다행이네요. 제 노래 들으러 와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 따로 연습실을 못 쓰고 있어서 집에서 들려드릴 수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갑자기 집으로 불러서 놀라셨을 텐데.."
"뭐 그런 걸로 미안해요. 귀한 곳에 누추한 제가 와서 죄송할 따름인데요.. 아, 저한테 들려주신다고 하신 노래는 발매 안 한 곡이에요?"
"네, 발매 못 한 자작곡이 참 많아요.."
승완 씨는 기타 바디에 귀여운 동물 캐릭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여진 통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 걸터앉아 기타 줄을 살살 튕겼다. 기타 헤드에 조율기를 물린 채로 기타 줄을 튕기던 그는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아까 한 이야기는.. 잊으셔도 돼요. 그런 얘기 해서 미안해요."
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기타를 잡은 채로 입술을 축이던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노래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저 지금 엄청 기대돼요."
"그러면, 처음부터 직접 만든 곡 들려드리기엔 제가 조금 부끄러워서.. 먼저 커버곡부터 들려드릴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시작으로 기타 위에 올라간 승완 씨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타 넥의 지판을 잡고 손목과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반주를 하는 그의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노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의 노래를 이리 가까이서 듣게 된 것은 처음이라 나까지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기타에선 클래식한 멜로디가 흘렀다. 잠깐 동안의 반주 후 승완 씨의 입이 벌어졌다.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가사를 허공에 꾹꾹 눌러 담듯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런 가사의 노래를 내 앞에서 이렇게 불러주고 있단 것에 설레게 되어서도 있었지만, 음색이 무슨 사람 마음을 밀었다 당겼다 간질이는 것만 같아서 분명 노래는 승완 씨가 부르고 있는데 얼굴은 내가 빨개지고 있었다. 그는 노래를 완곡한 뒤 기타를 치느라 조금 움츠렸던 몸을 다시 폈다. 아까 눈물을 떨어뜨리던 얼굴과는 달리 많이 낯빛이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잘 불렀냐며 조금 장난스레 웃는 승완 씨를 향해 나도 활짝 웃었다. 어디 하나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노래였다. 살면서 이런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가사를 툭툭 내뱉는다기 보다는 하나하나 정성스레 흘려 보내는 느낌이었다. 나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승완 씨를 보며 뮤즈를 찾았다는 생각을 했을 것만 같다. 음악을 그리 귀담아듣지 않는 내게 마치 정말 새로운 세상이 하나 열렸다는 생각이 들게 했을 정도였으니까.
승완 씨는 그렇게, 자신의 노래를 나처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꼭 들려주고 싶었던 자작곡이 있다면서 쉬지 않고 네 곡 씩이나 노래를 계속 불러 주었다. 20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걸 정말 혼자 만들었다고? 차트 상위권을 벗어나서는 절대 안 될 것만 같은 노래들을 감히 나 혼자 듣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진짜.. 이런 곡을.. 이런 곡을.."
"저도 참.. 좋아하는 노래예요."
"혹시 유튜브에 자작곡을 올리는 건 저작권 보호를 못 받나요? 이 곡 혹시 발매하실 생각은.. 아, 진짜 이런 말씀 드리기 너무 죄송한데, 이걸 저만 듣는 건 문화재 손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노래들로만 돈도 엄청 버실 수 있을 것 같고.."
아예 솔로가수를 해도 성공할 것 같은 사람이 혹시 밴드에 발이 묶여 이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분명 오지랖이라는 걸 아는데 내가 다 서럽기 시작했다.
"발매할 생각이 없진 않아요. 세상에 공개된다면 예림 씨 같은 분들이 제 노래를 더 많이 들어주시겠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무명이잖아요. 어차피 들을 사람도 많이 없을텐데 굳이 공개해서 곡을 더 못 건드는 건 좀 아쉬울 것 같아서요. 그냥 예림 씨만 계속 들어주셔도 좋아요, 전."
어차피 들을 이가 없으니 발매를 하지 않겠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나. 이번엔 내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계절이 바뀌는 걸 싫어하고, 계절에 의해 감성에 젖어드는 걸 싫어하고, 그렇기에 괜히 계절에 맞추어 그 감성을 겨냥해 만들어진 노래들의 끼워맞춰진 듯한 가사도 싫어한다. 그런데 승완 씨의 노래는 아니다. 계절에 맞춘 노래라고 무조건 밝거나 어스름한 분위기도 아니고, 많이 고민을 하며 써 내려간 티가 나는 글들이 노래에 담겨 있었다. 내가 매혹된 건 그 부분이었다. 노래가 아니라 계절 그 자체였다. 숭완 씨의 노래는.
발매, 그러나 당사자가 싫다는데 내가 뭘 더 권유할 수 있겠는가. 이건 밥을 사주느니 마느니 하는 가벼운 문제도 아니고 그가 만든 곡에도 그가 겪어온 무수히 많은 경험들이 들어있을텐데 함부로 공유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하루 새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내가 그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승완 씨가 다시 기타 줄을 튕겼다. 공개하지 않은 앞선 4곡과 달리 이 곡은 이미 발매를 했던 앨범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곡이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승완 씨의 흰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Midnight이라는 제목의 그 노래 또한 내가 유심히 들었던 곡이었다. 엇박이 많고 템포의 빠르기가 자주 바뀌어서 일반인이 혼자서 부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여러 명이서 파트라도 나눠 불러야 할 것 같은 곡을 혼자서 전부 소화해내는 게 대단하다는 감상을 남긴 노래였다.
실제로 앞에서 들으니 음원으로 들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승완 씨의 영어 발음은 음원으로 듣기에도 좋았는데 앞에서 들으니 정말 원어민 수준이었다. 나는 탁자에 몸을 기대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은 생각보다 더 맑고 예뻤다. 노래가 끝났음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나를 위한 미니콘서트를 즐긴 기분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노래를 만든 것에 영감을 준 무언가가 있는지.
"노래를 만들 때의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어오는 편이세요?"
"음.. 전 밴드원한테 많이 얻었죠. 지금은 나갔구요."
"아.. 예전 영상과 최근 영상을 봤을 때 멤버 변동이 많이 있는 것 같긴.. 하더라구요."
"그쵸. 가장 옛 공연 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밴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구성원은 이제 저 뿐이에요."
승완 씨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머리만 자꾸 귀 뒤로 넘기며 다른 할 말을 찾았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많이 있었는데, 물어봐선 안 될 것 같았다.
"그 전 밴드원이라는 분이 되게.. 좋은 분이셨나 봐요."
"네,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 있잖아요. 걔가 그랬어요. 꽃 보는 걸 엄청 좋아해서 집에도 다육이 엄청 키우고. 계절이 바뀌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셨나요? 사실 저도 좀 그래요. 근데 걔랑은 더워지고 추워질 때마다 항상 같이 나무랑 꽃 많은 곳을 걸었어요."
"그래서 밴드 이름도 체리블라썸으로 지으셨던 거예요?"
"그렇죠. 사실 걔가 나간 뒤에 새로 밴드에 영입한 친구들은 밴드 이름 바꾸고 새 출발하자고 했었는데,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계속 이러고 있는데, 부모님도 밴드 이제 좀 정리하라고 하고, 밴드원 친구들 조차 거의 밴드를 놓아버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연습도 안 하고 잘 모이지도 않아서 돈은 없고.. 연습실을 월세 내 가며 빌릴 필요가 없어져서, 지금은 연습실도 없어졌어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보며 승완 씨는 뒤에 미안하다며 사과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가 또 미안해요. 이야기 해 주셔서 감사한걸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승완 씨는 밴드 엄청 아끼실텐데..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네, 그 영감을 주었던 애가 나갈 때, 그냥 저도 밴드를 나가버릴까 했었어요. 그런데 너무 아까운 거 있죠. 제가 쌓아 온 시간들도 그렇고.. 작년 딱 이맘때 쯤 그 애가 밴드를 나갔네요. 꿈을 좇는 일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요."
"저, 혹시.. 대답하기 불편하시면 안 해주셔도 괜찮은데, 그 분이랑은 애인 사이셨어요?"
"아,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서로 정말 많이 아끼던 사이였어요. 순전히 친한 친구? 아니, 뭐 뮤즈라고 표현해도 과하진 않겠네요. 아, 제가 자꾸 말을 길게 하네요. 지금은 걔와의 관계에 딱히 미련은 없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승완 씨의 얼굴에 약간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후련해서일까. 억지로 웃는 척을 하고 계신 걸까.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는데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향수부터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아주 단단하고 커다란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노래를 만들고 불렀을 그 시간동안 아무도 그를 나만큼이라도 지지해주고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비참함이 몰려왔다. 그 뮤즈였다는 사람이 얼마나 승완 씨에게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승완 씨, 있잖아요.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들을 사람이 많이 없을 테니까 곡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그쵸."
"그럼 많은 사람이 승완 씨 노래를 듣게 된다면 공개하실 마음이 있어요?"
"으음, 네. 근데 확률이 정말 희박하잖아요. 유명해지는 거 정말 힘든데 제가 무슨 수로 제 곡을 띄우겠어요."
"공연 해요. 버스킹."
승완 씨는 내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공연이 말만 쉽죠. 밴드원들 보고 지금 공연 준비하자고 하면 다들 대답도 안 할걸요."
"우선 설득해보고, 안 되면 혼자 하면 되죠."
"혼자서요? 저도 생각해 많이 해봤었는데, 역시 힘들 것 같아요. 제가 한 번만 실수하면 다 무너져버리는 무대잖아요. 그리고 혼자 무대 꾸려갈 정도의 실력도 안 되고.."
"제가 도와줄게요. 할 수 있어요. 길거리 버스킹에서 실수 좀 한다고 야유하는 사람도 없잖아요. 실력은 말할 것도 없구요. 구경하는 사람들 계속 모여들걸요."
"아니에요. 전 잘.. 모르겠어요."
"그 뮤즈 분 때문에 그래요?"
"네?"
"그 뮤즈 분 생각에 공연도 못 하시겠고, 노래 부르다가도 매번 덜컥 겁도 나시고. 그런 거 아니에요?“
"……."
"사실 말씀하시는 거랑 표정에서 계속 티 났어요. 못 잊고 계신 거. 근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예술인이 어떻게 뮤즈를 잊어요."
"…정말, 그렇게 티 났나요. 공연을 하려고 할 때마다 제가 그 애 없이 뭔가 한다는 게 겁이 나더라구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고, 다 틀릴 것 같고.“
“승완 씨가 얼마나 잘 하시는 지 알아요? 와 진짜 노래로 세계 정복도 쌉가능.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승완 씨는 아,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말을 더 이었다.
"유명해지시면 그 뮤즈 분, 다시 만날 수라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뮤즈 분한테도 곡 들려드려야죠. 제가 밴드에 들어갈 순 없지만, 저라도 밴드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끝까지 도와드릴게요."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세요.."
"저 어제 문자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저 선생님 노래에 처돌았다고."
"허, 진짜.."
헛웃음을 치며 못 말린다는 듯 웃는 승완 씨의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그 날 우리는 저녁을 같이 먹고 진한 붉은 조명이 깔린 칵테일 바에서 술을 마셨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바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흥얼거리는 승완 씨의 입술에 키스했다. 충동적이고, 예고도 없었다. 그저 서로 같은 생각을 했기에, 우리는 단 맛이 나는 입맞춤을 이어갔다.
*
그 날 이후 공연을 고대했지만 결국 승완 씨의 밴드원들에게 연락이 오질 않아 승완 씨는 혼자만의 버스킹을 준비했다. 그는 풀이 죽어있는 나를 토닥여 주며 그동안 연습한 노래로 트랙은 짜 뒀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미리 찾아둔 버스킹 장소에 꼭 사람들이 많이 와주길 기도했다.
버스킹 당일에도 승완 씨는 하나도 긴장이 안 된다며 허세를 부렸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계획해둔 장소에 가서 보면대와 의자, 다른 장비들을 두고 공연을 준비했다. 침이 바싹 말라갔다. 막 학기가 시작하기 바로 전이어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버스킹 공연이 시작되고 나는 승완 씨의 모습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승완 씨는 계속 나를 쳐다보며 노래했다. 점점 관심을 가지는 듯하던 사람들이 노래 한 곡이 끝날 즈음엔 승완 씨를 원 모양으로 둘러싸고 제법 많이 공연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승완 씨는 행복해보였다. 벚꽃잎이 흩날리고 그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고 있는 모습에 나는 승완 씨가 나를 잊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높고 높은 자리까지 가서 나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세계에 이름을 날렸으면 좋겠다고. 마치 천사가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눈엔 그랬다. 승완 씨는 첫 앨범의 좋아요 수가 팔십으로 남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다. 정말.
버스킹이 끝나고,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다. 판을 뒤집을 정도로 아주 큰 성공까진 아니었지만 자신의 공연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던 승완 씨가 믿기질 않아서 몇 번이고 볼을 꼬집었을 정도면 다 좋은 거 아닌가. 승완 씨 밴드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천 명 대로 늘었고, 영상들도 만 단위로 조회 수가 올라갔으며 앨범 좋아요 수도 몇 배로 늘었다. 승완 씨는 아주 활짝 웃었다. 미소를 띄운 정도가 아니라 아주 행복하게. 전부 내 덕분이라고, 진작 버스킹 공연을 해볼 걸 그랬다면서 말이다. 제 몸만한 기타의 줄을 새 줄로 갈던 승완 씨는 내게 말했다.
"아, 맞다. 저 공연하면서 예림 씨 보는데, 머릿속에 뭐가 막 떠오르더라구요."
"오, 대박, 영감 떠오르신 거예요? 저도 뮤즈 시켜주시나요?"
"음, 조금 더 지켜 보구요?"
승완 씨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나도 승완 씨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를 쓸어내렸다. 더 성공할 당신을 위해, 내게 계절의 의미를 다시 새겨준 당신을 위해, 난 뭐든 할 수 있겠다.
fin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