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앓아요
삐까룽
언제부턴가 알람 없이 일어났다. 짜증나게 귓가에서 울려대던 기계음을 끊은 건 새 학기가 시작된 후부터였다. 평생 알람은 못 끊을 줄 알았는데.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일단 손승완 때문이었다. 지각은 하지 않도록, 손승완의 그 나긋한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예림은 그 목소리가 잠을 방해하는 걸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침 몰골을 손승완에게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게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이다. 오늘도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일어나, 예림아.”
정말 그 목소리는 단 일 분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딱 일곱 시가 되면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예림은 단번에 일어났다. 잠에서 깨기 싫어서 핸드폰을 침대 아래로 던진 나머지 액정까지 깨먹은 적이 있었다. 그 정도로 예림은 잠에서 깨어나기 싫어했다. 예림은 흐릿한 시야 때문에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럼 작은 손이 예림의 손목을 쥐어왔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걱정한 것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예림은 그런 다정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음을 들킬까, 자주 뿌리치긴 했다.
“눈 다쳐, 비비지 말고.”
“졸려요.”
“일어나야지~”
“쌤은 안 졸려요?”
승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늘 승완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아침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깨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안 하셔도 돼요.”라고 예림이 말 했을 때 승완은 웃기만 했다. “난 좋은데~ 아침에 예림이 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손승완은 분명 저에게 사제의 정 이상은 없었다. 예림은 그 후로 수긍했다. 이제는 승완이 깨워주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잘해 주다가, 사소한 거에도 서운해 하면 어쩌려고. 예림은 서운함을 숨기려 애썼다.
자리에서 일어난 예림은 바로 식탁 앞으로 가 앉았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 벌려진 입으로 토스트가 들어왔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 승완은 재밌어했다. 이런 장난으로도 저렇게 웃다니. 예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삭바삭하고 반숙 계란에 베이컨까지. 딱 예림의 입맛에 맞춘 아침이었다. “어서 먹고 학교 가자. 오늘부터 주번이라고 했나?” 예림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토스트를 우물우물 씹어 넘겼다. “데려다 줘?” 예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그러자 아쉬운 듯한 한숨이 들려왔다. 예림도 승완에 대한 건 뭐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오늘 애인 만나러 간다면서요.” 나른한 눈을 겨우 떠보면, 그 앞에는 방긋 웃고 있는 승완이 있었다.
저 기분 좋은 웃음이 오늘만큼은 보기 싫었다. 기분 좋은 승완을 볼 때면 기뻤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 오늘 어때. 예뻐?” 승완은 갑자기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예림을 빤히 바라봤다. 예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승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승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짝반짝,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어디가요?”
“안 예뻐?”
“예, 뭐…….”
“진짜? 진짜 별로야?”
예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 이걸 어떻게 대답하지. 예림은 입을 크게 벌려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씹다가 꿀꺽, 한 번에 넘겼다. 예림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꽃받침을 떼어낸 승완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예림을 흘겼다. 예림은 어깨를 으쓱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스트를 남김없이 해치운 후였다. 승완은 울망한 표정으로 예림을 바라보며 “정말 별로야?”라고 물었다. 예림은 교복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며 승완을 흘끗, 바라봤다. “아, 예쁘죠! 예뻐요, 예뻐.” 왜 그런 놈 때문에 그런 걸 신경 써. 뒷말은 꾹 삼켰다. 그래도 승완이 좋아하는 사람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커트까지 입은 예림은 신발장에 서서 신발을 신었다. 하품을 길게 하는 예림을 따라 나가 승완은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여기 상처 났다. 자다가 긁었어?” 승완이 말하는 것에 예림은 볼 근처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하지만 승완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더 아래를 가리켰다. 차가운 승완의 손이 목에 닿았다. “이따가 약 바르자. 내가 연고 사올게.” 승완의 말에 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승완의 말이라면 꼭 다 들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봄비가 그치면 겨우 핀 꽃들이 모두 떨어질 거였다. 예림은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손승완 꽃 나들이 간다고 좋아했는데, 확 데이트 취소해버리라지. 예림은 툴툴 거리며 길가의 모난 돌을 발끝으로 걷어찼다. 톡톡 굴러가던 돌이 물웅덩이에 빠졌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비가 오면 집에서 실내 데이트라도 할 게 아닌가. 둘이 만나지 않게 하려면 뭘 해야 하지. 한참 방법을 고민하던 예림은 한숨을 푹 쉬어냈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져서 우산을 꽉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교문만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결국 발을 헛디뎌 물웅덩이를 밟았다. 양말이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확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유치해졌다. 지금 짜증이 나는 건 손승완 데이트 때문이 아니야. 축축한 양말에게 화를 돌리며 툭툭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장마가 먼저 오려는지 비가 점점 세차게 내렸다.
학교에 도착한 예림은 교무실로 가 출석부와 분필, 열쇠를 챙겨 올라왔다. 아직 교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교탁에 출석부와 분필을 올려둔 뒤 책상에 가방을 올렸다. 필사적으로 우산을 썼더니 가방은 젖지 않았다. 가방을 열어보니 바로 위에 메모지와 함께 양말, 슬리퍼가 들어 있었다. 승완이 넣어둔 게 분명했다. 메모지의 바른 글씨가 승완의 것이었다. ‘비 온다고 꿀꿀해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비 올 때는 더 집중 잘 돼~’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공부를 강조하는 게 웃겼다. 축축한 양말과 신발을 벗어 책상 아래에 두었다. 보송보송한 양말, 슬리퍼로 갈아 신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양말은 누명을 벗었다. 예림은 없는 색의 분필을 꺼내 채워두고 빗자루를 가져와 교실을 청소했다. 주번 일은 늘 귀찮았지만 아무도 없는 교실에 있는 건 때로는 좋았다. 고요한 교실에 혼자 있다는 게, 특히 오늘은 빗소리가 들리는 게 좋았다. 보송한 양말의 느낌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들었다.
오늘 저녁은 먹고 들어올 거야? 숙제 다 해야 하는 거 알지.
청소를 다 끝마치고 겨우 책상에 앉았을 때 문자가 왔다. 승완이 보낸 문자였다. 숙제를 재촉하는 문자. 사실 예림은 내일까지 해야 하는 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이렇게 숙제를 재촉하는 선생님은 싫어했지만 승완은 다르다. 승완의 말을 따르면 예림은 툴툴거리면서도 잘 하는 학생이었다. 다른 선생님들한테는 들은 적 없는 말이었다. 승완이 숙제를 해오라면 꼭 미루고 미루다가도 밤을 새서 해갔다. 승완은 예림이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성실하다고 예림의 어머니에게 자주 말했다. 예림의 어머니는 그것이 모두 승완 덕분인 것을 알고 있었다. 예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승완 때문에 바뀐 점이 많다는 걸.
승완은 예림의 어머니 친구 딸이었다. 엄친딸이라는 별명에 맞게 승완은 만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도, 공부도 잘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공부를 잘 해왔고 결국 지금은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승완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예림의 어머니는 늘 예림에게 승완에 대해 말했다. 승완 언니가 뭐 했다더라. 예림은 승완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과목과 잘 하는 과목. 학교생활을 어떻게 보내는지, 애인은 있는지까지 모든 것을 알았다. 예림은 자꾸만 자신과 비교되는 승완이 싫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점점 높아질 때마다 예림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예림은 문자 답을 하지 않은 채 엎드렸다. 일찍 일어나는 건 아직도 힘들었다. 오늘 밤은 숙제를 해야 하니까, 미리 푹 자 둬야 했다. 성적은 학교 수업을 듣는 것보다 승완과 공부할 때 더 올라갔다. 학교 선생님들께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예림이 집중할 때는 꼭 승완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두 팔을 겹치고 그 위에 이마를 꾹 대었다. 1교시가 시작 되려면 아직 삼십 분 넘게 남았다. 승완에게 문자가 왔으니까, 왜인지 승완의 꿈을 꿀 것만 같았다. 꼭 승완과 수업한 날 밤이면 승완의 꿈을 꾸었다. 자주 생각한 사람의 꿈을 꼭 꾼다는데. 그런 말들은 미리 뇌 속 쓰레기통에 버려두었다. 예림도 알았다. 자기 전 생각한 건 꼭 꿈에 등장했다. 예림은 그래도 눈을 꾹 감았다. 승완의 꿈을 꾸어도 자야 했다.
예림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 엄마는 학교 근처 자취방에 살면서 공부하라 했다. 예림은 자유로운 자취 생활을 꿈꾸며 긍정했다. 자취를 하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야식을 먹는 것도 자유였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 노는 것도. 물론 고등학생이라는 자각이 있어서 자유롭게 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어머니가 왜 갑자기 자신을 믿고 자취를 시켜주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여기 어머니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행복하게 짐을 싸던 예림은 어머니의 숨겨둔 카드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건 승완과의 첫 만남 때였다. 그날 예림은 학원이 끝나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늘 출장을 가는 아버지 빼고 집에는 엄마만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엄마 말고도 엄마의 친구와 승완까지 모두 있었다. 예림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현관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는 세 명의 사람들을 보고 당황한 채 고개를 어설프게 숙였다. 승완 또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엄마와 엄마의 친구만이 즐거운 표정으로 예림에게 인사했다. 누가 봐도 승완도 어색해 보였다. 예림은 허허, 웃으며 바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완이가 가서 이야기 해 봐.”
“그, 그럴까요?”
“응, 예림이 착해.”
“싫어하진 않을까요?”
“그럼, 그럼. 승완이를 왜 싫어하겠어.”
곧이어 승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예림의 방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예림은 한숨을 푹 쉬며 가방을 내려두고 어지러운 방을 겨우 치웠다. 바닥에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물건들을 모두 침대에 올려두고 이불로 덮어 두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완이었다. 예림은 슬쩍 문을 열어 주었다. 승완은 어색하게 웃으며 예림에게 “들어가도 돼?”라고 물었다. 예림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늘 비교 대상이었던 승완이 방에 들어오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밖에서 흐뭇하게 보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문을 활짝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승완은 굉장히 머쓱하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하며 예림의 방으로 들어갔다. 예림은 방에 들어와 방황하는 승완을 의자에 앉게 했다. 예림은 바로 침대로 가 앉았다. 어지러운 물건들을 들킬까봐 이불을 꾹 쥐었다. 승완은 예림을 보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예림의 방을 살폈다. 예림 또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뜯었다.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승완이 왜 왔을까. 어머니의 말을 듣고 예림에게 잔뜩 잔소리를 할 거라 생각했다. 예림의 머릿속 승완 이미지는 딱 그런 거였다. 모범생에, 자신이 잘난 걸 너무 잘 아는 사람. “예림이가 공부를 안 해.”라고 하는 엄마의 말을 듣고 그럼 제가 이야기 좀 해볼까요? 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 있었다. 예림은 슬쩍 고개를 들어 승완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람쥐를 닮은 얼굴이었다. 머리칼을 염색한 건지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칼은 정말 얼굴과 잘 어울렸다. 저도 모르게 예림은 승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게 되었다. 승완이 고개를 돌렸을 때, 예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왜인지 승완의 얼굴을 훔쳐본 것처럼 된 것만 같았다.
생각했던 이미지랑은 다르네. 예림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순하고 착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안절부절 하는 게, 조금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이야, 김예림. 예림은 자기 혼자 당황해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머니한테 들었어?”
“뭘요? 아, 자취하는 거요?”
“아, 아니…. 나랑 과외 하는 거.”
과외라는 말에 승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학원을 끊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는데. 자취를 쉽게 시켜준 이유는 승완 때문이었다. 예림은 승완의 입에서 나온 과외라는 말에 먼 허공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어쩐지, 쉽게 허락해 줄 리가 없는데. 예림은 고개를 돌려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있을 엄마를 원망했다. 승완은 가만히 앉아 예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실 이런 건 승완도 불편했다. 용돈 좀 벌어볼까, 생각하고 좋다고 말한 거였는데. 물론 승완 어머니의 압박도 있었다. 예림이 싫어하는 것 같으니,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예림은 승완에게 민폐가 되진 않았을까 더 불안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예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이렇게 된 이상 승완과 친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예뻐서 마음이 자꾸만 끌린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예림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방긋 웃었다. 승완은 처음 보는 예림의 웃는 표정에 당황했다. 분명 예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예쁠 거라 생각하진 못했다. 예림은 승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승완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좋은 대학에 갔는지 취미는 뭔지, 대학생활은 재밌는지까지 모든 걸 물었다. 엄마 입에서 나오던 대답과는 달랐다. 승완은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승완은 예림의 리액션을 줄이려고 애썼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네. 예림은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7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생각보다 승완은 편한 사람이었다. 공부 이야기도, 친구들 이야기도 꽤 잘 맞았다. 순박한 모습이 가끔 놀려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 승완에 대한 생각은 바뀌었다. 승완은 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림이 배 안 고파? 어서 밥 먹으러 가자.” 예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완을 따라 나섰다. 어느새 승완의 말을 자연스레 듣기 시작했다. 조련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네. 이래서 엄마가 승완을 저에게 붙여준 건가, 생각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아, 너 자취방 옆집이 바로 승완이 집이야.”
“네?”
“아, 그건 까먹고 말 못 했다.”
식탁에 앉자마자 예림의 엄마는 입을 떼었다. 승완은 그 말을 듣고 당황한 듯이 바로 옆에 앉아있는 예림을 바라봤다. 예림은 처음 과외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깨를 으쓱이고 “나쁘지 않지.”라고 말했다. 예림의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승완을 바라봤다. “너도 승완 언니 좋지? 엄마도 승완이 덕분에 너 내보낸다.” 예림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조금씩 끄덕였다. 승완은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승완은 어른들이 딱 좋아할 느낌이었다. 바른 사람. 승완을 표현하면 딱 그 단어가 제일 어울렸다.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승완과 승완 어머니는 돌아갔다. 어머니는 자꾸만 예림에게 승완이 좋은지 물었다. “아, 좋다니까. 진짜 좋다고.” 귀찮다는 듯이 대답한 예림은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문을 꾹 닫은 채였다.
눈을 감았다. 학원도 다녀오고 낯선 사람을 만났더니 몸이 노곤했다. 예림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더운 숨이 나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렇지만 이불을 걷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불이 걷히고 눈을 뜨면 천장에 승완의 얼굴이 다시 보일 것만 같았다. 승완의 얼굴, 승완의 목소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미워했던 감정을 가졌던 게 미안해졌다.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승완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이상한 감정, 푹 빠진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잠시 승완에 대한 생각을 하던 예림은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날 승완의 꿈을 꾸었다. 그때 예림은 느꼈다. 승완에 대한 감정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
자취방으로 돌아가니 승완이 있었다. 오늘 데이트 나간다고 했었는데. 예림은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승완을 바라봤다. 승완은 소파에 기대 앉아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티브이를 보고 있는 줄 알았지만 승완의 눈빛이 공허했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저렇게 승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예림은 그런 승완의 표정을 보면 불안했다. 또 승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겠지. 승완은 늘 애인만 만나면 아팠다. 눈이 낮은 건지 아님 승완이 너무 착해서 연애 스타일도 모두 퍼 주는 스타일이기 때문인지. 그런 승완의 연애를 줄곧 지켜본 건 예림이었다. 예림은 방에 가방을 내려두고 거실로 나왔다. 투룸인 예림의 자취방은 꽤나 넓었다. 승완은 예림의 기척을 느끼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왔네?”
“데이트 안 갔어요?”
숨기고 말 돌리는 건 예림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스타일이란 게 뭔지, 예림은 승완에겐 한없이 조심하고 싶었지만 스타일도 지키고 싶었다. 승완은 눈치가 빨랐으니까. 예림이 조금이라도 달라진 것처럼 보이면 왜인지 눈치 챌 것만 같았다. 예림이 승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림은 그래서 줄곧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승완을 볼 때도, 승완과 말할 때도 말이다. 그 노력 덕분인지 예림은 끝까지 들키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나고 고등학생의 꽃, 십팔 살이 시작된 후에도 끝까지 예림은 비밀을 지켰다.
예림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걸터앉았다. 승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이 위치에서는 승완의 행동이나 표정이 잘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예림은 승완의 뒤에 서서 늘 승완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승완이 모든 걸 토해내고 기대는 존재가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승완은 나름 예림에게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예림의 말에 고개를 젓고 푹 숙이고 있던 승완은 고개를 확 들었다. 빤히 승완을 바라보고 있던 예림은 당황했다. “왜, 왜요.” 울망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승완과 연애한다던 그 사람, 이번에도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이었으니 말이다.
승완은 자주 이상한 사람만 만났다. 눈이 낮은 건지, 늘 상처 받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오늘도 분명 그 남자는 승완에게 쓰레기짓을 한 게 분명했다. 만날 거면 좋은 사람이라도 만나서, 기회라는 게 전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던가. 늘 승완이 상처 받는 모습을 보며 예림은 기회가 생길 거란 생각을 했다. 그게 얼마나 악한 생각인지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잔뜩 상처를 입은 승완이 절대 상처를 주지 않을,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림은 못된 생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승완 옆에 붙어 앉았다. 승완은 옆에 붙어 앉은 예림에게 고개를 꺾어 기댔다. 이제 그 남자에 대한 욕이 시작될 거였다.
“맨날 자기 마음대로 약속 취소하고…,”
“그러게 왜 만나요, 그런 남자를.”
“…헤어질까?”
“안 헤어질 거 다 알아요. 조금 울다가 또 연락할 거면서.”
승완은 순애보적인 면이 있었다.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땅굴을 파고 내려가야 헤어졌다. 상처란 상처는 다 받고 못 볼 꼴 다 보여주고 본 뒤에야 헤어져야겠다, 진심으로 말했다. 아직 헤어질 타이밍이 아니란 것은 승완보다 예림이 더 알고 있었다. 승완은 맥주캔을 꼭 쥐고 슬슬 흔들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헤어질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해 잠시 멍 때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언제쯤 연락이 올까, 기다리는 행동이기도 했다.
예림은 한참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뻐근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는 승완이 꾹 쥐고 있는 맥주캔을 가리켰다. 승완은 의아한 표정으로 예림을 빤히 올려다 봤다. 예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한 모금만요.” 승완은 예림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움직이더니 맥주캔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미성년자가 술은 무슨 술이야.”
“한 모금은 제사 때도 마셔요.”
“그래도 안 돼. 선생님한테 술 달라는 제자는 처음인데?”
“제가 첫 번째 제자잖아요.”
“안 돼. 어머니 얼굴을 어떻게 보니….”
강경한 승완의 태도에 예림은 칫, 소리를 내며 포기했다. 승완은 왜인지 예림에게 단단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승완은 예림의 일상에도, 학업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아꼈다. 정말 친동생이라고 되는 것처럼 말이다. 친동생이란 말은 조금 쓰라렸지만. 승완과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난 동생이 없으니까, 네가 꼭 동생처럼 느껴져.” 처음에는 승완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학업인 면에서 벗어나 일상에도 개입하는 승완이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없으면 허전했다. 승완이 일상의 전부가 되었다. 사실 자취만 시작하면 행복 시작일 거라 믿었는데, 그 행복을 침범하는 건 늘 승완이었다. 그 침범이 행복을 만들기도 했지만.
*
예림은 늘 교묘하게 굴었다. 학교생활에 충실한 것도, 충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고픈 것들은 꼭 하면서도, 선생님들 눈 밖에 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예림을 보며, 활발한 아이, 장난기 있는 아이라 말했다. 예림은 그런 이야기를 안정시키려 애썼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두루두루 모든 선생님들, 아이들과 친해졌다. 늘 교실의 중심이 되었다. 모범생도, 양아치도 아닌 그 중간에 서서 이익 되는 것들을 얻었다.
자취의 로망,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로망을 부순 건 승완이었다. 승완은 늘 바른 길로 가게 만들려고 손목을 쥐고서 이끌었다. 선생님을 넘어선 것 같았다. 선생님을 넘고 가족이 아닌 사이.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하필이면 언니 동생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생활로 깊게 스며드는 행동이, 예림은 불편했다. 자신이 제일 삐딱하게 걷게 만드는 사람은 승완이었다. 아무래도 승완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
“너 사고 치면 승완이가 다 나한테 알려줄 거야.”
“알았어……. 사고 안 친다니까.”
“승완아, 감시 좀 잘 해줘.”
“그럼요. 예림이는 감시 안 해도 잘 할 거예요.”
처음 자취방에 들어간 후로 예림은 승완을 피해 다녔다. 자꾸만 승완에게 드는 이상한 감정을 이제 멈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중학생 때부터 눈치 채고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승완은 달랐다. 엄마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게 제일 큰 문제였고 도저히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란 게 그 다음 문제였다. 승완은 늘 예림에게 잘 해주고 웃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예림은 승완에게 그저 엄마 친구의 딸, 제자. 그뿐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상처 받을 거란 걸, 누구보다 더 예림이 알았다.
수업 외에 승완을 처음 마주친 건, 오피스텔 건물 입구에서였다. 새벽 두 시, 다른 친구들과 밖에서 한참 놀다가 승완이 잠들었을 거라 생각한 시간에 들어간 거였다. 정신은 멀쩡해졌지만 아직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예림에게도 느껴졌다. 그래도 담배는 피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예림은 최대한 승완을 스쳐 지나가려고 노력했다. 승완은 편의점에 물을 사러 나온 것 같았다. 손에는 페트병을 들고 있었다. 예림은 살짝 고개를 까딱인 뒤 승완을 스쳐 지나갔다. 승완은 그런 예림의 팔뚝을 잡았다.
“너 지금 몇 시야.”
“아니,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
“뭘 도와줘. 이 시간에.”
“아니, 그게…….”
승완은 가만히 서서 예림을 바라봤다. 예림은 살짝 몸을 웅크리며 승완의 눈치를 봤다. 승완은 작아도 크게 느껴졌다. 예림에게는 승완이 너무 크게만 느껴졌다. 승완은 꾹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분명 예림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았을 거였다. 모른 척 해 주는 걸까. 내일 엄마가 자취방에 들어오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승완은 한숨을 푹 쉰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림은 가만히 그런 승완을 힐끗 바라봤다.
옆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승완이 따라왔다. “하루만 재워줘.” 승완의 말에 예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새 혼나고 학교에 가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바로 앞에서 엄마에게 연락하려고 그러는 걸까. 예림은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도 머릿속에 승완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승완 눈에는 아무 것도 없이 예림은 그저 애새끼로만 보일 거였다. 그게 너무 억울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승완은 사온 물을 마신 뒤 소파에 앉았다. 예림은 꾸물꾸물 승완에게 다가가 바닥에 앉아 승완을 올려다봤다. “어서 옷 벗고 자자, 피곤하잖아.” 승완의 말에 예림은 의아해 하면서도 옷을 벗고 잘 준비를 했다. 씻고 나오자 승완은 언제 집에 다녀온 건지 이불과 베개를 챙겨 소파에 누워 있었다. 예림은 가만히 승완을 바라보다가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말랑하고 하얀 볼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눌러봤다. 승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새벽 세 시였으니까. 승완은 많이 피곤하겠지. 예림은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끌어올렸다. 승완 행동의 이유를 찾으려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승완이 흔드는 것에 잠에서 깼다. 학교 가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느낌이 끊임없이 목구멍을 건드렸다. 인상을 팍 썼다. “해장하자.” 승완의 말에 예림은 하품을 길게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승완을 따라 나가보자, 식탁에 빨간 콩나물국이 있었다. “너 혼자 있었으면 해장도 안 하고 학교 갔을 거잖아.” 예림은 앉아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엄마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무언가 틀어졌다. 괜히 이상한, 멀어질 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
승완은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제자 앞에서 남자친구 욕을 했던 게 기억에 남은 모양이었다. 사실 승완이 기억을 못 하더라도 예림이 기억하게끔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승완은 의자에 앉아 숙제를 살피면서도 예림의 눈을 못 마주쳤다. 텅 비어 백지가 되어 있는 숙제를 보고 승완은 바로 예림을 돌아봤다.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승완이 예림에게 숙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림은 무심한 표정으로 승완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누구 위로해 주느라 못 했어요.” 승완은 한숨을 푹 쉬더니 책상 위에 엎드렸다.
“내가 잘못 했어…….”
“괜찮아요, 뭐. 남친이 그렇게 쓰레기처럼 굴면 울 수도 있죠.”
“쓰레기 아니야…….”
“알겠어요, 알겠어. 연락 안 하고 매번 약속 깨먹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네.”
승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예림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푸스스, 웃어버렸다. 그렇게 당하고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예림은 승완이 답답했다. 아무리 쓰레기처럼 굴어도 사랑해 주면서, 자신은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게 화가 났다. “오늘은 숙제 다 끝내자.” 바로 기운을 차린 승완은 턱을 괴고서 예림을 가만히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인 예림은 펜을 쥐고서 숙제를 시작했다. 귀찮아서 그렇지 시작하면 금방 끝낼 숙제였다. 승완은 왜인지 예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슨 하고픈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승완은 숙제를 하면서도 온 신경을 승완에게 집중했다. 마음을 알았는지 승완이 입을 열었다.
“이번주 주말에 집에 갈 거야?”
“고민 중이요. 쌤이랑 보낼 생각이었는데.”
“나랑?”
“놀아주기로 했었잖아요. 아닌가?”
“……그랬지.”
꽤 시무룩해 보이는 모습에 예림은 끄적이던 것을 멈추고 펜을 내려놨다. 이번주 주말을 함께 보내자고 말한 건 승완이었다. 이번 중간고사를 잘 본 예림에게 맛있는 걸 사 주기로 한 거였다. 예림의 집에서 미리 결제해둔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시켜 먹고.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승완 덕분에 특별하게 변했던 날이었다. 예림은 싸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눈치가 빠른 자신을 한 번도 탓한 적이 없었지만 이럴 때는 꼭 눈치가 없었으면 했다. 먼저 아는 것은 아무런 대비가 되지 않았다. 그저 먼저 상처받을 뿐이었다.
“왜요?”
“아니, 그날 남자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그래요?”
“응, 어제 못 만난 거 꼭 만나자고…….”
“응.”
“미안, 한 번만.”
승완이 얼마나 약속에 철저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감기 몸살 때문에 흐느적거리면서도 꼭 과외는 하러 오는 사람이었다. 마스크를 단단하게 쓰고 멀찍이 떨어져서, “오늘은 문제 풀자.”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약속 파기를 한다는 건, 그 사람이 정말 소중하다는 뜻이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예림이 다시 분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걸 알게 되면 상처가 깊어졌다. 당신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린 애새끼같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도저히 멈출 수는 없었다. 좋아한다는 게 정말, 사람을 애새끼처럼 만드는 것 같았다. 예림은 가만히 승완을 바라보다가 다시 숙제를 보며 턱을 괴었다. 펜을 들고 적어 내려가던 것을 이어갔다. “괜찮아요.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승완은 ‘그런 사이’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예림은 스스로 말하고도 상처를 받았다. “나중에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예림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수업이 끝나고 승완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 주에는 만나지 못하겠네, 생각했더니 머리가 아팠다. 그대로 비척비척 걷다가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첫사랑이 지독하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가장 지독한 사랑이 첫사랑이 된다. 예림은 그걸 믿었다. 승완을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걸 예림은 알았다. 이렇게 앓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했지만, 인정해야겠다. 우선순위로 올라가고 싶어. 예림은 아픈 머리를 꾹 움켜쥐고 몸을 말아 웅크린 뒤 그대로 잠에 들었다.
이곳저곳 숨겨뒀던 담배를 모아 버린 적이 있었다. 버리면서도 전혀 아까운 감정이 들지 않았을 때, 예림은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 번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서 예림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일반 쓰레기봉투를 어떻게 다 채울 수 있을까. 예림은 그날 대청소를 했다. 죽어도 끊고 싶었다. 예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때는 정말 죽어도 담배를 끊고 싶었다. 텅 비어 있는 일반 쓰레기봉투 밑바닥에 담배 세 갑을 버리고는 그 위에 쓰레기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담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방을 뒤져 쓰레기를 찾았다. 보이지 않으면 생각나지도 않을 테니까. 담배는 승완과 달랐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생각에서도 지울 수 있었다.
금연의 이유는 승완이었다. “요즘 숨 쉬기 힘들어서 끊었어.” 대충 넘긴 이유는 계속 예림을 쿡쿡 찔렀다. 언제까지 따라다니면서 찌를 거야, 물으면 꼭 승완을 향한 감정을 그치면 멈출 거라 말할 것 같았다. 승완은 바른 사람이니까. 예림은 승완을 좋아하고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 검열하고 변화하고 슬퍼하고 다시 질문했다.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스스로를 자꾸만 검열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끝까지 그 비웃음을 다시 비웃지 않던 예림이, 쓰레기봉투를 버릴 때 비웃었다.
승완에게 들킨 건 한순간이었다. 수업하는 날이었다. 이곳저곳에 담배나 들키면 안 되는 것들을 숨겼다. 수업이 끝나고 승완은 마트에 가겠다고 말했고 그날 하필이면 비가 왔다. 예림은 얇은 옷을 입고서도 그냥 나가겠다는 승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겉옷을 주워 입혔다. 승완은 조금 더 큰 예림의 옷을 꼭 맞게 입으려 소매를 접고는 방긋 웃으며 예림을 바라봤다. 가까이 다가와 팔꿈치로 예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 김예림 좀 설레는데?”
“됐어요, 무슨.”
“내 애인보다 설레~”
그럼 나랑 사귀던가, 예림은 훅 올라온 말을 삼켰다. 괜히 의심받을 말은 하지 말자. 겉옷을 입고 킁킁거리던 승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예림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예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어서 다녀와요. 비 더 오기 전에.” 승완의 어깨를 쥐고서 방에서 내쫒으려 했다. 승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승완은 신발을 신던 것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잡힌 물건을 쥐어 꺼냈다. 작고 네모난 담배였다. 예림은 순간 모든 생각을 멈췄다. 저걸 왜 저기에 넣어뒀을까. 예림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담배를 바라보던 승완은 그걸 신발장 위에 올려두고선 아무 말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예림은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몸을 움직였다. 신발장에 승완이 둔 담배를 낚아채고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방을 뒤엎어 정리한 뒤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꽉꽉 채워진 쓰레기봉투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는 엉엉 울었다. 그만큼 승완이 커져 있었다. 그 승완의 차가운 눈빛, 승완이 실망했을 거라 생각하면 할수록 예림은 울었다. 승완이 겉옷을 주러 돌아온다면, 수업 때문에 다시 방에 온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예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을 겨우 그치고 예림은 쓰레기봉투를 버렸다. 누가 보면 이렇게 엉엉 울 일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예림에게는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봉투를 꽉 채우는 것이, 그 봉투를 버리는 것이 말이다. 예림이 집에 돌아가자, 승완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예림은 신발장 앞에 있는 거울에서 눈을 확인한 뒤, 슥슥 부빈 뒤 바로 승완에게 다가갔다. 겉옷은 잘 개어져 식탁 위에 있었다. 승완은 예림을 빤히 바라봤다. 그 무신경한 눈빛이 보기 싫었다. 승완은 그런 건조한 눈빛을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는데, 예림은 울컥울컥한 것이 다시 눈에 몰려오는 걸 느꼈다. 입술을 꾹 깨물다가 예림은 승완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거 친구 거예요. 잠깐 맡아달라고 어제 줘서….”
“울었어?”
“그래서 그냥 맡아주고 있던 거예요. 저 담배 안 피워요.”
“알겠어. 왜 부었어, 눈은.”
승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뻗어 예림의 얼굴을 감쌌다. 예림은 더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것을 멈췄다. 비 오는 날 밖에 다녀온 승완의 손이 차가울 거라 생각했는데, 승완의 손은 누구의 손보다 따뜻했다. 예림은 가만히 멈춰 있다가 승완의 손에 눈을 비볐다. “그냥, 비 와서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완도 예림을 따라 일어난 뒤 천천히 신발장으로 걸어갔다. “계란 눈에 대고 자.” 승완의 말에 예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란 올려두면 바로 침대에 떨어질 걸요.” 승완은 환하게 웃고는 집을 나섰다. 예림은 식탁에 놓인 겉옷을 들어 품에 꽉 안았다. 승완의 냄새가 푹 풍겼다. 늘 승완이 뿌리고 다니던 향수 냄새가.
하루종일 울었던 그날 밤은 잠에 쉽게 이루지 못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첫사랑은 끝까지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예림은 그날도 겨우 잠들어, 일어날 때 목이 다 쉰 상태였다. 눈은 퉁, 부어 있었고 천장을 보기도 어려웠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승완의 얼굴이나 보일까 기대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일어났다. 그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던 그날처럼 예림은 일어났다. 독감이라도 시작된 걸까. 예림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시야는 흐릿하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기념일로 체크해둔 달력은 벅벅 지워져 있었다. 승완은 지금쯤 남자친구에게 가 있겠지. 예림은 눈을 꾹 감았다. 아무리 아파도 절대 승완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우선순위를 확인할 것만 같았다.
‘아프면 약 챙겨 먹고. 집에 들어갈 때쯤 찾아갈게.’
이런 문자가 날아오진 않을까. 승완이 남자친구와의 만남을 끝내지 못하고 예림을 미뤄두지는 않을까.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려고 애썼다. 칭얼거리고 싶다. 마냥 어린애처럼 굴면서 무거운 사랑을 승완에게 지워주고 싶었다. 쉬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목을 벅벅 긁어대던 예림은 겨우 잠에 들었다. 그 꿈에서는 승완이 나올 것만 같았다.
*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카페 알바생은 커튼을 쳤다. 유리창이 훤히 드러나고 빗물이 주르륵, 내려가는 게 보였다. 빗소리도 더욱 거세지는 것 같았다.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하러 온 거였다. 빗소리를 들으면 더욱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니까. 잔잔하게 들려오는 소리 덕에 승완도 어딘가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승완 앞의 의자는 텅 비어 있고 방금 전까지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은 밖에 나가 전화 중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커피는 천천히 식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승완은 그곳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곳에 집중하면 더욱 착잡함과 고민이 밀려들 것만 같았다.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예림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늘 두 시간 이내에는 답을 하는 예림이었는데, 오늘따라 연락이 오지 않았다. 승완은 잠시 자판을 두드리다가 멈췄다. 무슨 말을 보내야 할까. 예림이 상처 받은 게 분명했다. 시험 잘 보면 소원을 들어주겠다, 한 건 승완이었다. 맛있는 거 사달란 소원이겠지, 생각했다. 예림은 주말 중 하루만 자기랑 보내자는 소원을 말했다. “하루만요.” 그 딱 하루에 무엇을 할까 승완과 예림은 참 많이 고민했다. 예림이 많이 기대한 것처럼 보였는데. 환하게 웃던 얼굴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승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뜯었다. 상처 많이 받았을까, 예림이.
승완은 예림에게 드는 미안한 감정이, 특이하다는 걸 알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느끼는 미안함과는 다르다. 괜찮다는 예림이, 괜찮지 않으면 좋겠다는 그런 못된 생각을 했다. 언제부터 시작된 생각인지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예림이 온전히 자신에게 기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그런 못된 생각을 왜 하는 걸까. 승완은 결국 예림에게 보내려던 내용을 모두 지웠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냥 예림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락이 오고. 아무렇지 않게 승완은 그 연락을 받고. 언젠가 미안한 감정은 사라지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진 승완에게 남자가 다가왔다.
“미안해. 요즘 너무 바쁘다. 어디 갈까? 어디 갈래? 가고 싶은 곳 있으면 가자.”
이번에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 믿었다. 승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사람이란 걸. 사람을 좋다, 안 좋다로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승완과 맞지는 않는 사람들이었다. ‘원래 성격이 반대인 사람을 좋아하는 거래.’ 친구가 해준 고민 상담을 늘 곱씹었다. 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분명 만나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좋았다. 늘 친구들도, 후배들도, 선배들까지도 승완에게 의지했다. 그런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승완도 가끔은 기대고 싶었다. 기댈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무뚝뚝하고 바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 사람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단단하단 거였다. 승완은 얌전히 앞을 응시했다. 그러곤 다시 환하게 웃었다. 이런 고민들을 꾹꾹 숨겨야만 했다. 원래 연애는 잃으면서 하는 거라잖아. 승완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가벼운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이제껏 자주 못했던 단순한 것들 말이다.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그런 것들을 하고 싶어서 우선 영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다.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이미 예림과 결제해둔 거였다. 오늘 원래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내일이라도 꼭 같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또 예림을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승완은 결국 애인이 고른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흔한 로맨스, 코미디 영화였다. 환하게 웃는 애인을 보며 승완은 슬며시 웃었다. 이럴 때는 걱정하지 않게, 미안하지 않게 환하게 웃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었다. 자꾸만 예림 생각이 났다.
흔한 내용을 가진 영화였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그런 반복되는 내용들. 그래도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즐겁게 보고 있었다. 옆을 흘끗 바라보니 애인은 자신이 고른 영화임에도 집중하지 않았다. 화면 밝기를 최대로 줄인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국 애인은 전화를 받으러 극장을 나섰다. 많이 바쁘다고 했지. 애인은 늘 승완을 혼자 둘 때가 많았다.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좋은데, 요즘 더 바빠지고 있었다.
사실 애인이 식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꼭 그런 고민을 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이제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 고민을 할 때면 늘 옆에 예림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새끼 왜 만나요.” 예림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말할 때면 “나쁜 말 쓰지 말라고 했지.”라며 타박했지만, 가끔 그런 예림의 나쁜 말들이 시원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난 그 대사가 좋더라. 영화를 보고 난 후 자리를 옮겼다. 데이트할 때마다 자주 오는 일식집이었다. 애인은 대사를 읊으며 승완에게 말했다. 애인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다 알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승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를 보면서도 승완은 생각했다. 애인에 대한 건 정말 다 알고 싶어지는 걸까, 말이다. 지금 애인과 연애를 이어가면서 승완은 애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를 숨기고 만난다면 더 설레고 오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밀은 승완에게 늘 연애가 오래가게 해 주는 장치였다.
예림의 담배를 처음 찾아냈을 때를 떠올렸다. 예림이 꾹 숨기고만 있던 그 비밀을 저도 모르게 찾아냈을 때, 승완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예림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예림에게 실망했다고. 예림이 담배를 피워서 실망했던 게 아니었다. 예림이 자신에게도 그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좋지 않았다. 예림이 처음 술을 마신 것도, 친구들과 노느라 늘 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예림의 어머니도 알지 못하는 여러 사실을 승완은 알았다. 반 개월 정도의 시간 안에 승완은 예림에 대한 걸 전부 알았다. 그게 뿌듯했다. 늘 예림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했고 결국 다 알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림에게 실망한 걸까. 자신에게 숨기고 있던 비밀이 있었다는 게. 그게 서운했다. 그래도 승완은 그 생각을 버리려 애썼다. 이게 무슨 감정이야, 어린애한테. 후드티에서 풍겨오는 알싸한 그 냄새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거라고, 그렇게 넘겼다.
애인은 다시 승완을 떠났다. 급한 일이 있다며 간 것이었다. 승완은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사려고 했다. 애인은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떠났다. 승완도 그냥 비를 맞고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럼 수업 하다가 예림에게 옮을 거고, 입시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예림에게 감기까지 안겨 주긴 싫었다. 승완은 우산을 꾹 쥐었다. 예림이 빌려줬던 우산이 생각났다.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어느새 예림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 집에 잘 들어갔어요? 비와요. 우산은요.
- 어디에요?
예림의 문자가 쌓였다는 걸 늘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승완은 자신이 못된 생각을 자주 한다고 생각했다. 예림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틱틱거리는 예림이 틱틱 거리면서도 제 눈치를 본다는 걸, 어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까지 승완은 알았다. 승완은 예림의 모든 걸 알려고 노력했고 정말 모든 걸 알았다. 그러면서도 예림을 쥐고 놓지 않은 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 승완은 빠르게 핸드폰 화면을 두들겼다.
- 우산 없어. 여기 그 골목 편의점.
- 오려고?
곧이어 예림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 기다려요.
승완은 들고 있던 우산을 내려두고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그 전에 바나나 우유를 샀다. 예림에게 줘야지. 승완은 비가 아직 추적추적 내리는 밖으로 나갔다. 몸에 시린 바람이 끝없이 불었다. 예림은 지금쯤 달려오고 있을까. 넘어지면 안 돼. 승완은 몸을 감싸 안고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예림이 왔다. 예림은 정말 달려온 건지 헉헉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승완은 그런 예림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왜 뛰어왔어. 천천히 오지.” 승완은 예림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림은 그 손을 확 낚아채더니 제 우산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둘은 천천히 비 오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예림의 손을 꾹 잡고 있었다. 예림의 손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늘 차가워서 수업할 때도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비교적 따뜻한 손의 승완이 늘 잡고 따뜻하게 만들어 줬었는데. 예림의 손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어느새 오피스텔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늘 예림이 집에서 자고 갈래. 그때 샀던 영화 보자.” 예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림이 이상했다. 얼굴도 뜨거웠고 자꾸만 몸을 휘청거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예림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드러누웠다. 헉헉 거리는 숨소리, 뜨겁게 달아오른 몸의 열. 승완은 예림이 몸살에 걸렸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승완은 예림을 침대에 바르게 눕히고 열을 내리기 위해 물수건을 올렸다. 미리 사다뒀던 비상약을 꺼내 넘기지 못하는 예림의 입에 강제로 넣고 겨우 삼키도록 만들었다. 예림은 끙끙 앓으면서도 “아, 쌤……. 괜찮다고요.”라며 칭얼거렸다. 승완은 제 행동을 저지하려는 예림의 손등을 툭 치고 옷을 벗겼다. 열이 도저히 내려가지 않았다. 차가운 물로 계속 물수건을 적시고 예림의 몸을 닦았다. 어느새 예림은 한숨을 푹, 쉬어내며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겨우 열이 내려간 예림을 바르게 눕혀두고 승완은 그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고개를 숙여 가만히 예림을 바라보다가 심장 부근에 귀를 대었다. 헉헉 거리던 숨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고요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만 했다. 비가 오면 어딘가에 집중하기 편해진다는데. 승완은 예림에게 집중했다. 고요해진 숨소리, 안정된 호흡. 예림이 왜 감기에 걸렸을까. 승완은 저번 수업 시간에 봤던 예림의 표정을 상기했다. 실망한 걸 숨기려 애쓰던 그 표정을 떠올렸다. 승완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핸드폰을 다시 켰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승완은 깨달았다.
*
예림은 하루를 꼬박 앓고서 눈을 떴다. 어느새 일요일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봄비가 그치고 꽃은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창문에 꽃잎이 들러붙어 있었다. 꽃이 저렇게 못나게 생긴 건 딱 이때뿐일 것이다. 예림은 몸을 일으키려고 두 팔을 뒤로 짚었다. 그때, 우응,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제 옆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자고 있는 승완이 있었다. 예림은 끙, 소리를 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승완을 데리러 가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그 뒤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예림은 손을 들어 승완의 머리에 올렸다. 부들부들, 강아지 같은 머리칼. 어제 승완은 애인 만나서 좋았을까. 기분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또 그놈이 이상한 짓 했겠지. 한 번 앓고 나면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앓는 건 더욱 이 사랑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첫사랑은 끝까지 못 잊는다는데. 예림은 승완의 꾹 눌려진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앓고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승완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예림은 빠르게 손을 떼어냈다. 예림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아 승완을 빤히 바라봤다. 눈을 부비던 승완이 기지개를 쭉 폈다. 승완이 자고 일어난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다. 승완은 빤히 저를 쳐다보는 예림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다시 얼굴을 이불에 파묻다가 예림의 허벅지에 턱을 기대고 예림을 올려다 봤다.
“몸은 어때, 괜찮아?”
“응, 정신이 맑아졌어요.”
“다행이다…….”
“…….”
“……왜?”
“아니, 그냥요. 좀 잘래요?”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승완은 의아하단 표정으로 예림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불을 쥐어 들추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승완은 두 팔을 예림의 허리에 감싸고 옆구리에 볼을 꾹 기대 눈을 감았다. 예림은 당황해 눈알을 이곳저곳으로 굴리다가 결국 손을 내려 승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승완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또 애인이랑 싸운 걸까, 속상한 얼굴은 아니었는데.
예림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에 끼워두고 두고두고 꺼내보는 기억이 있었다. 승완이 연애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였다. 그러니까, 승완의 연애가 아닌 예림의 연애에 대해서 말했을 때였다. 수업을 모두 끝내고 예림이 깎아둔 사과를 아삭아삭, 승완은 베어 먹으며 예림을 빤히 바라봤다. 미리 숙제 끝내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승완의 앞에서 방금 내준 숙제를 푸는 예림을 말이다.
“너는 왜 연애 안 해?”
“입시 준비 하지말고 연애할까요?”
“아니, 안 했으면 좋겠어서.”
예림은 가만히 승완을 흘겨봤다. 그때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내는 승완 때문에 다시 웃음을 지어냈지만. 예림은 “그냥 귀찮아서요.”라고 답했다. 승완은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 승완이 사과를 사각사각 먹는 소리만 들렸다. 승완이 또 무슨 말을 꺼낼까, 두려웠다. 지금 그냥 바로 침대에 누워버릴까. 예림은 숙제에 집중한 것처럼 고개를 푹 파묻고 글씨를 끄적였다.
승완은 다 먹은 사과 접시에 포크를 내려두고 나머지 사과를 우물우물 씹어 넘겼다. 예림은 다 먹은 승완의 접시를 들어 방을 나섰다. 이제 연애 이야기는 그만 물어봤으면, 했지만 승완은 예림을 따라 나오며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 승완의 물음에 예림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냥 확 고백해버려, 라는 부사어 가득한 생각도 했지만 한숨을 쉬어내며 참았다. 오늘은 안 돼. 애인 있는 사람에게는 안 돼.
예림은 바로 고무장갑을 끼고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소리가 쏴아아, 들려오고 접시가 이리저리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예림을 보던 승완은 식탁에 놓여 있던 접시들을 모아 싱크대로 가져왔다. “나 좋아하지, 예림이.” 승완의 말에 접시를 깨뜨릴 뻔했다. 예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예림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어린 사랑이 어떻게 들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헤어졌다?”
“왜요?”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왜요.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놈이?”
“아니, 내가 그랬어.”
승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예림만 당황하고 있었다. 예림은 그저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 그놈이 못되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걸 수도 있잖아. 승완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예림을 빤히 바라봤다. 승완은 예림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고민하는 예림에게 승완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을 승완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잘했어요…….” 예림이 힘없이 말했다. 그러다 몸을 눕혀 승완의 머리에 팔을 댔다. 팔베개는 처음인데~ 승완은 괜히 장난치며 예림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너무 못된 짓을 하는 걸까.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바로 저 방 한 벽면에 예림의 교복이 걸려 있었다. 승완은 눈을 꾹 감고서 잠에 들려고 했다.
“왜 헤어졌어요?”
“……예림이가 더 좋아서.”
“쌤?”
예림은 고개를 살짝 내려 승완을 바라봤다. 눈 감고 자려던 승완이 얼굴을 들어 예림을 빤히 바라봤다. 눈동자에 다 보였다. 다 알고 있다는 저 눈빛. 예림은 급하게 눈을 돌렸다. 창문에 늘러 붙어 있던 꽃잎이 어느새 다 떨어지고 없었다. 한 번 우수수 쏟아진 꽃잎들은 다시 새롭게, 아름답게 피어났다. 사랑도 한 번 앓으면 더 행복하고 나아지겠지. 예림은 새근새근 잠에 든 승완을 느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걸 들었을까. 승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