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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티뉴어스 클라이밍

흰먹

어떤 격차는 너무 조그맣고 사소해 보여서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신경 쓰이지 않는 그런 것들…….


 와, 김예림. 너 체육복 잠옷으로 입냐? 친구가 뜬금없는 말을 툭 뱉었다. 뭐? 예림이 떨떠름한 얼굴로 친구를 돌아본다. 친구가 체육복 바지를 가리켰다. 이거 무릎 나왔잖아. 얼마나 입고 잤으면……. 장난스러운 말이었다. 예림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어떻게 알았냐. 어제도 입고 잤는데. 친구가 웃음을 터뜨린다. 빨아 입긴 해? 그냥 하나 새로 사. 그 말에 예림도 웃는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새로 사긴 뭘 새로 사. 이것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졸업생이 입던 거 물려받은 건데. 

 

 

 


 그러니까 격차는 이런 것이었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 속에서도 나타나는 그런 것. 익숙해질지언정 결단코 무뎌질 수는 없는 그런 것. 어쩌면 날 때부터 이미 정해지는 그런 것. 아주 구질구질한 것. 

 


 김예림이 사는 곳은 주택가에 있다. 마당을 반쯤 가로질러 건물 옆에 있는 옥외 계단을 올라가야 나온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고, 모퉁이를 한 번 돌아서 오르면 이내 시야에 방수 페인트가 가득 들어찬다. 우레탄 페인트의 반짝거리는 녹색이 눈을 어지럽힐 때쯤 좁은 층계참 반 바퀴를 돌면 집이 보인다. 탁한 적갈색 옥탑방. 그게 예림이 사는 곳이다. 여름이면 쨍쨍한 햇빛에 쪄 죽는 것 같고 겨울이면 찬 바람이 들어차 온몸이 시린 곳. 햇볕 좋은 날에 빨래 잘 마르는 것 말고는 죄다 개 엿 같이 느껴지는 곳에서 네 명이 꾸역꾸역 살았다. 엄마 아빠 김예준 김예림. 

 


 몇 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이렇게 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삼신할미가 잘못 점지한 걸 수도 있고. 이런 집구석에 애가 태어나는 게 말이나 되나. 그것도 둘씩이나. 때때로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특히나 온 가족이 좁은 집에 함께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김예림의 오빠 김예준은 예림보다 네 살이 많았다. 수능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쳐서 대학에 붙었는데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며 반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년간 없는 형편에 돈 털어서 학원 보내고 과외 붙여준 걸 옆에서 본 예림의 속이 한 번 뒤집혔다. 예준의 이상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봤을 때 속이 한 번 더 뒤집혔고, 아빠가 흔쾌히 알겠다고, 그러니까 돈을 대주겠노라는 식으로 대답했을 때는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단체로 해까닥한 게 아니고서야 이 대화가 지금 말이 되나? 예림은 벌떡 일어나 예준의 면전에 대고 또라이냐고 소릴 질렀다. 미친 새끼야, 돌대가리야, 지랄염병을 해라 아주. 그 말까지 나오고 나서는 순 개싸움이 벌어졌다. 엄마 아빠가 달려들어 둘을 겨우 떼놓았지만, 집안 곳곳과 몸에 개싸움의 흔적이 남았다. 안 그래도 금방 부서질 듯 위태로웠던 밥상의 다리가 나가고, 누리끼리한 색의 벽지에 긁힌 자국이 생겼다. 김예림은 눈 밑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래도 김예준 얼굴에도 긁힌 상처 한 줄이 남았으니 패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승리인가? 예림은 이불 사이로 스며드는 초봄의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패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승리는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해서 무승부가 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건 아빠가 알겠다고 했으니, 예준은 반수를 할 것이고, 뺨에 남은 생채기는 끽해야 몇 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다. 흉터라도 남으면 좋으련만 김예림이 고양잇과 동물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나. 게다가 상처로만 쳐도 김예준보다는 김예림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림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한 박자 늦은 패배감이 들었다.

 

 

 


 분노가 잠을 달아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예림은 이불을 뒤집어쓴 지 오 분도 안 돼 살그머니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벽 옷걸이에 걸어놨던 인터넷 쇼핑몰 출신 싸구려 기모 후드를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싸늘한 추위가 몸 곳곳에 파고들었다.

 

 

 


 미친놈.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이사 들어올 당시부터 있었던 평상 위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보았다. 별은 한두 개 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마저도 인공위성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김예림은 깜깜한 하늘을 보며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울화통을 겨우 삼키다 평상에 등을 대고 누웠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추위를 견디며 빌었다.

 

 

 


 이따위로 살기 싫으니까 고통 없이 한 방에 보내주세요. 아니면 돈 주시던가요. 아멘. 

컨티뉴어스 클라이밍
사이의 격차

 고통 없이는 개뿔이 고통 없이다. 야밤에 궁상떨다 안 걸렸을지도 모르는 감기나 얻었다. 가만있어도 몸이 으슬으슬하고 이가 위아래로 딱딱 부딪쳤다. 예림은 결국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몇 년 전에 유행하던 패딩을 꺼내 꿰입었다. 이게 유행하던 시절 김예준이 엄마에게서 얻어낸 것이었다. 위쪽은 빨간색이고 아래쪽은 새까만 색인 배색 패딩. 예준은 이걸 딱 일 년 입고 옷장에 처박았고, 몇십만 원짜리 패딩은 이제 동네 슈퍼에 갈 때나 입는 옷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그러니 지금은 패딩으로써는 신세가 나은 편이다. 김예림이 이걸 입고 학교에 갈 테니까.

 


 예림은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푸르딩딩한 멍 위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 가린 뒤에야 집을 나섰다. 집 바깥이나 집 안이나 삼월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건 똑같았다. 계단을 내려가, 대문 밖으로 빠져나와, 아직 개장하는 분위기인 시장통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와 겨루다 보면 버스가 온다. 스물다섯 정거장 정도 가면 내릴 수 있다. 아침 일찍 타지 않으면 스물다섯 정거장을 꼼짝없이 서서 가야 한다. 예림은 남들보다 이불에서 빨리 나오는 대신 버스에서 잠을 보충하는 걸 선택했다. 

 

 

 


 김예림의 등교 시간은 보통 주번인 애들보다 빨랐다. 주번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만, 예림은 그냥 교실에 올라가기 전에 교무실에 들렀다 가는 길을 택했다. 이 학년 교실은 사층에 있었는데, 누군지도 모를 주번이 혹시나 빨리 왔을 가능성에 기대 교실로 갔다가 문이라도 잠겨 있으면 또 교무실까지 내려갔다 와야 한다. 게다가 교무실은 다른 건물 이층에 있어서 거기까지 가는 길을 생각하면, 총 여섯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교실에 일찍 간다고 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도 예림은 후문 길을 다 걸어 내려오자마자 교무실 건물로 향했다. 여섯 시 반인데 누가 있겠어. 그런 맘은 열쇠함을 열자마자 깨졌다. 이 학년 오 반 열쇠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었다. 주번이 교실 문 안 잠그고 갔나. 이따금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럴 소지가 다분해 보였다. 

 


 닫혀있던 교실 뒷문을 열었다. 바깥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훈기가 훅 끼쳤다. 예림은 교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칠판과 그리 멀지 않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애가 드르륵 소리에 예림을 돌아본다. 눈이 휘둥그레한 것이 반 친구의 이른 등교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예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살폈다. 친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기 전에 그 애가 먼저 입을 뗀다.

 


 “안녕.”
 “어, 안녕.”
 “일찍 왔네.”
 “어, 너도.”

 

 

 


 짧은 대화가 어색하게 끝났다. 예림은 등 뒤로 뒷문을 닫고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패딩을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가방까지 가방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았을 무렵 그 애가 뒤를 돌아보며 다시 말을 붙인다. 너 아침 먹었어?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는 말에 예림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거 같이 먹을래?”
 “……뭔데?”

 

 

 


 그 애가 몸을 옆으로 틀어 책상에 놓인 걸 보여준다. 은박지 위에 올려진 김밥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아까부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더라니. 너 먹을 거 아니야? 그 애가 고개를 내젓는다. 너무 많아서 혼자 다 못 먹어. 같이 먹자. 거절하려 했는데 고소한 향 때문인가, 별안간 허기가 훅 밀려들었다. 예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예림은 그 애 옆자리에 앉으며 재빨리 명찰을 훑었다. 파란색 바탕 위에 노란 실로 자수돼 있는 이름은 손승완이었다. 맞다, 손승완. 얘 임시 반장이었지. 이름을 보니 그런 것들이 생각났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떠들었던 거. 공부 잘하고 성격 좋댔나. 안 친한 애한테 선뜻 아침을 권하는 거 보면 성격이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했다. 승완이 나무젓가락을 신중하게 분리하는 모습을 흘끔 보았다. 이윽고 깔끔하게 나눈 젓가락을 예림에게 내민다. 이건 카레고 이건 김치야. 그러면서 김밥 종류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가만, 카레 김밥? 예림은 제 귀를 의심했다. 

 


 “카레 김밥이란 게 있어?”
 “짜장 김밥도 있던데.”
 “뭐? 먹어봤냐?”
 “아니.”
 “……암튼 잘 먹을게.”
 “응, 많이 먹어.”

 


 우유도 마실래? 승완의 손에 언제 꺼냈는지 이백 밀리리터짜리 초코 우유가 들려있다. 김밥에 초코 우유? 조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승완이 나무젓가락을 떼줄 때처럼 우유곽 입구를 양쪽으로 열어 준다.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원래 이런 것까지 좀 조심스럽게 하나. 예림은 되도 않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고맙다는 말을 웅얼거렸다.

 


 “근데 넌 안 먹어?”
 “나 많이 먹었는데.”

 


 예림이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꼴랑 기껏해야 다섯 개 집어 먹은 모양새였는데. 그게 많이 먹은 거냐고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오지랖을 부리기 싫어 그냥 기준이 다르겠거니 했다. 당사자가 배부르다는데 더 먹으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나. 예림은 그런 결론을 내리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어느 가게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밥은 맛있었고, 김밥과 초코 우유의 조합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엊저녁부터 지금껏 씹는 거라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배에 김밥 한 줄 반을 다 욱여넣었다. 텅 빈 은박지를 보고 나서야 예림은 머쓱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 내가 다 먹었네. 그 말에 승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어차피 남으면 버렸을걸. 왜 버려, 아깝게.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근데 예림아, 너 왜 그렇게 일찍 와?”
 “아, 나. 버스 시간 때문에…….”
 “멀리 살아?”

 

 

 


 예림은 동네 이름을 말해주지 않고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멀리 어디 사는데, 그것까지 물을 줄 알았는데 승완도 고개를 주억거릴 뿐 더 묻지 않는다. 잠시간 찾아온 정적에 예림이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섰다. 잘 먹었어. 승완이 대답 없이 웃었다. 예림도 어색하게 웃으며 은박지와 우유곽을 집어 들었다. 어, 내가 버려도 되는데. 그 말에 예림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먹었으니까 내가 치울게. 단호한 말에 승완이 알겠다고 대답한다. 갑작스러운 식사 시간이 끝났다. 

 

 

 


 일곱 시 반쯤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온다. 일 학년 때 친했던 애들이 가방을 걸자마자 예림의 자리로 와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근데 김예림, 너 밴드 뭐야? 계단에서 넘어졌다, 왜. 친구들이 깔깔거린다. 조심 좀 하지 그랬냐. 하여간. 그런 말을 끝으로 주제가 넘어간다. 예림은 허무한 농담과 저와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사이에서 웃으면서 승완의 뒤통수를 흘끔거렸다. 문제집을 꺼내놓고 풀어 내려가는 그 뒷모습에서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쟤는 반창고 얘기 꺼내지도 않았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1.

 


 김예준 이 씹새끼를 언젠가는 죽이고 말 것이다. 예림은 돼지 저금통 배 위로 난 칼자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스물둘 처먹은 놈이 털어갈 게 없어서 고등학생 동생 저금통을 털어가? 화가 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놓고 말해봐야 발뺌할 테고 엄마 아빠에게 말해 봐야 별 효과도 없을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내가 이걸 어떻게 모았는데. 제 앞으로 된 지점이 세 개나 되는 편의점 점장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매대를 정리하고 닦던 제 모습이 떠올라 울컥한다. 예림은 저금통을 바닥에 던졌다. 동전 한 닢도 남지 않은 빈 저금통이 텅, 하고 공허한 플라스틱 소릴 낸다.

 


 예림은 지갑과 휴대 전화만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그나마 월급을 아껴 써서 지갑에 돈이 조금 남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예림은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가 가장 빨리 오는 버스에 타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순식간에 동네를 벗어나 얼마간 달리더니 이제는 대교를 건너고 있다. 학교 갈 때 타는 버스와는 전혀 다른 노선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예림은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강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예림은 방바닥을 뒹굴고 있을 배 째진 돼지 저금통을 생각했다. 그 안에 있는 지폐며 동전이며, 그걸 깡그리 털어가 PC방에서 컴퓨터나 하고 있을 예준이 떠오른다. 예준이 주장하는 말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칙칙한 조끼를 입고 계산대를 지키고 선 제 모습이 떠오른다. 그쯤 버스는 대교를 빠져나가고, 반짝대던 강물은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예림은 하차 벨을 눌렀다.

 


 주말마다 오는 동네였다.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이 있는 동네. 예림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은 빌딩이나 고급진 아파트 따위를 올려다보았다. 예림은 정류장 안쪽으로 들어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쇠 의자가 온기를 앗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추웠다. 버스에선 더운 것 같았는데. 어디 들어갈 데도 마땅찮아 하릴없이 앉아만 있으려니 배가 고팠다. 의자가 따뜻해질 무렵 예림은 일어서서 정류장 밖으로 나왔다. 아무 방향으로 쭉 걷다 보니 학원가가 나오고, 학원가 앞을 지나자 분식집이나 패스트푸드 가게가 나왔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다.

 


 한, 둘, 셋, 넷, 다섯……. 만 원짜리 다섯 장에 천 원짜리 두 장. 도합 오만이천 원. 그게 김예림 수중에 있는 전재산이었다. 김밥 한 줄에 비싸면 삼천 원일 테고, 런치 시간은 훨씬 지나고도 남았으니, 햄버거는 단품이 사천 원이고 세트로 하면 오천오백 원이 훌쩍 넘을 것이다. 지갑을 다시 닫았다.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음 그만인 걸 여기서 돈을 써야 하나. 아, 구질구질해. 집구석이 싫어 집에서 나왔는데 거리에서 이딴 생각이나 하는 게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건 아니었고, 예림은 발걸음을 돌렸다. 반대쪽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가 예림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자 승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진짜 예림이네. 예림이 떨떠름하게 인사를 내뱉었다.

 


 “안녕, 반장.”
 “응, 안녕. 너 여기 살아?”
 “……아니, 그냥 친구 집 놀러 왔어.”

 


 친구 집은 개뿔…….

 


 “아, 진짜? 다 놀고 이제 집 가는 거야?”
 “응.”
 “밥 먹었어?”

 


 얘는 저번부터 왜 자꾸 밥 타령일까. 한국인은 밥심이라더니, 한국인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밥 같이 먹을래?”
 “어?”

 


 뜻밖의 말에 예림이 주머니 속의 지갑을 매만졌다. 나 돈 없는데. 돈 없어서 집 가서 라면 끓여 먹으려고 그랬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니 그냥 말을 흐렸다. 아, 나 지갑 안 가지고 와서 그냥 집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옹색한 변명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예림은 그 목소리가 그처럼 들리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사줄게.”
 “……왜 사줘?”
 “내가 먹자고 했으니까.”

 

 

 


 급한 일 없으면 같이 먹어줄래? 예림이 망설였다. 망설이고 있는 게 짜증 난다. 지갑 안에 오만이천 원이 있는데도 쉽사리 내 돈 내고 먹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싫다. 친하지도 않은 애 앞에서 쪽팔리게. 지갑의 반들반들한 면이 손 끄트머리에 걸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가락으로 지갑 표면을 세 번 쓸고 나서야 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에는 내가 사줄게. 그런 말을 하면서.

 

 

 


 손승완은 이제 임시 반장이 아니라 그냥 반장이었다. 짧은 임시 반장 기간이 끝나고 투표로 뽑았는데도 반장 자리를 거머쥔 걸 보면 공부만 잘하는 애가 아니라 친구까지 많은 것 같았다. 하긴, 후보 뽑을 때부터 앞다투어 추천받긴 했다. 예림은 키오스크 앞에 선 승완의 뒤통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 학년 들어서 처음 본 애한테도 이만큼 잘해주는 걸 보면 다른 친구들이 얘를 왜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새로 나온 거래. 승완이 트레이를 예림의 앞쪽으로 밀며 말했다. 화려한 바탕색 위로 굵은 글씨가 적혀져 있다. 예림은 잘 포장된 햄버거를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는 감자튀김이 있고 그 옆에는 콜라가 있다. 햄버거, 감자튀김, 콜라. 이렇게 세 개 합쳐서 세트. 가격은 칠천 원에 육박한다. 칠천 원짜리 햄버거 세트를 그리 친하지도 않은 같은 반 애한테 거리낌 없이 사주는 우리 반 반장. 햄버거를 보고만 있자 승완이 의아한 얼굴로 예림을 본다. 안 먹어? 예림이 어색하게 웃었다. 먹어야지.

 

 

 


 비싼 거라 맛이 있는 건지 그냥 햄버거를 오랜만에 먹어서 맛이 있는 건지 예림은 알 수 없었다. 분명 배도 고프고 맛있는데, 어쩐지 체할 거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햄버거를 반쯤 남기고 내려놓은 채 감자튀김을 뒤적였다. 눅눅한 소금기가 손가락 끝에 들러붙었다. 미끄럽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감자튀김도 몇 개 집어먹고 말았다. 빨간색 포장지 안에 노란색 감자튀김들이 반 이상이나 남아 있다. 먹고 싶단 맘이 들지 않았다.

 


 왜 이러지, 공짜 햄버거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예림은 거칠한 냅킨에 손을 닦으며 생각해보지만 그렇다 할 매듭은 지어지지 않는다. 승완이 흘끔 예림의 얼굴을 살피더니 햄버거를 내려놓았다. 예림아, 다 먹었어?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까? 

 

 

 


 “너 다 먹었어?”
 “다 먹었어.”

 

 

 


 먹긴 먹은 건가. 햄버거에 입을 대고 깨작거린 티가 났다. 다람쥐가 먹어도 저것보단 많이 먹겠네. 예림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남은 거 다 버리겠지. 버린다고 생각하니 아까운데 포장해가는 건 창피했다. 내 돈 주고 산 것도 아닌데. 그러는 사이 승완이 일어선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완이 계단을 통해 사라진다. 예림은 트레이를 들고 일어서서 곧장 카운터로 간다. 직원이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묻는다. 남은 것 좀 포장해주세요. 직원이 카운터 밑 쪽에서 봉투를 꺼내 트레이 위에 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이내 마크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종이봉투를 예림에게 내민다. 감사합니다. 예림이 그걸 받아들었을 때쯤 승완이 나타난다. 손에 들린 갈색 봉투를 흘끔 본다.

 

 

 


 “뭐 더 샀나 보네?”
 “어, 너겟 샀어.”

 

 

 


 인생이 참 구질구질…….
 

 

 2.

 

 

 


 한동안 체육 수업을 체육관에서 하거나 이론 수업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천연 잔디를 심기 위해 운동장을 갈아엎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학 때 하면 될 일을 구태여 학기 중에 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열정 없는 체육 선생님은 대부분의 수업을 이론 수업으로 퉁쳤다. 중간고사 범위를 미리 알려주겠다고 했다. 쌤, 아직 삼월인데요. 얀마, 곧 사월이야. 중간고사까지 한달 조금 안 남았어. 누가 한 말을 간단히 일축하고는 체육 교과서를 꺼내라고 종용한다. 어차피 체육 수업이야 다들 귀찮게 여기는 것이었으니 애들은 군말 않고 교과서를 꺼냈다.

 


 체육 선생님은 교과 내용을 짚으면서 수업하다가도 곧잘 다른 길로 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야, 이거 오랜만에 보네. 내가 말이야, 대학교 다닐 적에 클라이밍 동아리였는데……. 그렇게 운을 떼고 나면 알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이 줄줄 나왔다. 언제는 진짜 암벽 등반을 갔었는데, 응? 안자일렌이라고 아냐. 아는 사람? 없네. 그게 뭐냐면은, 로프를 이렇게 딱, 다 같이 묶는 건데. 그러고 나면 동시에 막 오르는 거야. 한 명 떨어지면 인제 다 같이 죽는 거지. 이걸 연속등반이라고 하는데……. 쌤, 이거 시험에 나와요? 가만있어 봐, 인마. 어른이 얘기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예림은 샤프를 쥐고 창밖을 보았다. 귓가로 어려운 용어들이 들이닥친다. 컨세큐티브는 무엇이며……. 통 무슨 소린지 쉽게 알 수 없는 것들. 이야기하는 사람만 재미있는 그런 거. 그런 이야기에는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지겨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교정 너머 길에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직 날이 서늘하게 느껴지는데도 분홍색이 앞다투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가 위태롭게 흔들렸으나 매달린 꽃잎은 쉽게 나뒹굴지 않았다. 빨리 벚꽃 다 지고 봄도 다 가버리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체육 선생님은 여전히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는 등반 얘기를 하고 있다. 문득 교탁 앞쪽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예림은 괜히 샤프 뒤꽁무니를 딸깍이며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반 반장, 손승완. 좋은 동네 사는 애. 승완이 그 동네 주민인 건 그 날 알았다. 그러니까 햄버거를 얻어먹은 날. 승완은 구태여 예림과 함께 정류장까지 같이 가주었다. 몇 번 버스 타냐는 말에 머뭇거리자 슬쩍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넌 몇 번 타? 겸연쩍은 맘이 들어 괜히 되물었다. 난 버스 안 타. 요 바로 앞에 살아서. 승완의 대답에 예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 나 버스 오는 거 같은데. 그래, 잘 가. 너겟 잘 먹구. 승완이 손을 흔들며 정류장 밖으로 사라진다. 예림은 휴대 전화로 버스 노선을 검색하는 척하며 멀어지는 승완의 모습에 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몇억 정도 할까, 그 동네 집들은. 몇억으로 되나? 택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럼 몇십억 정도 하나. 아니면 몇 조? 가늠이 안 됐다. 모르긴 몰라도 비싸긴 하겠지. 돼지 저금통 배를 오백 번 갈라도 그 동네는커녕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 집은 얼마 정도 하려나. 월세가 어쩌고, 보증금이 어쩌고…… 그런 목소리만 귓속을 웅웅 울린다. 꼭 이명처럼…….

 


 빠각. 별안간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이명 같은 게 사라진다. 예림은 교과서를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샤프를 그 위에 눌렀는지 부러진 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샤프를 누른 곳에 검은 점과 자잘한 샤프심 찌꺼기가 있다. 손으로 그것들을 전부 털어냈다. 샤프심이 손날에 붙어 지저분한 자국을 남겼다. 예림은 개의치 않는다. 

 


 체육 선생님은 여전히 클라이밍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졸업하고 나면 꼭 해보라며, 대학 가서 동아리 있으면 꼭 한 번 들어보라며, 그런 말을 한다. 짝지가 하품을 하며 투덜거린다. 저 얘기 언제까지 하냐, 진짜……. 예림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클라이밍. 이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

 


 더운 게 낫냐, 추운 게 낫냐, 하면 김예림은 둘 다 별로라고 대답할 것이다. 옥탑방의 여름은 말 그대로 만두 찜통과 다를 바가 없고, 겨울은 체감상 마이너스 십팔 도 이하를 유지하는 냉동고와 같았다. 그러면 가을이 좋으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푸릇푸릇하던 이파리들이 점차 시들어가는 걸 보고 있으면, 그리 감상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래도 여름 가을 겨울이 봄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김예림이 사계절 중에 제일 싫어하는 건 봄이었다. 사람들은 봄을 좋아하는데 예림은 봄이 싫었다. 제 생일이 봄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싫었다. 뚝 떨어졌다 치솟는 일교차나, 눈과 코를 괴롭히는 알레르기 비염처럼 누구나 싫어할 만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봄. 입춘부터 곡우까지 약 두 달. 직접 겪는 날씨로만 친다면 다른 계절에 비해 매우 짧게 느껴지는 계절. 뭇 사람들은, 봄에 개화하는 벚꽃을 좋아하고, 노란 개나리를 좋아하고, 따사로운 햇살을 좋아하고, 미지근한 기온을 좋아하고, 선선히 부는 바람을 좋아한다. 

 


 예림은 벚꽃도 싫고 개나리도 싫다. 길을 따라 걸을 때마다 분홍색 꽃잎이 우르르 떨어지는 것도 싫고, 삐죽 튀어나온 개나리가 막아서는 것도 싫고, 벚꽃길 아래로 벌떼처럼 모인 사람들이 시끄럽게 구는 것도 싫고, 누가 지나가든 말든 길을 막고 사진 찍는 것도 싫다. 주변 사람들이 꽃놀이를 가니 마니 하면서 수선떠는 것도 싫고, 그냥 봄이라는 계절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죄다 싫었다. 

 

 

 


 다른 사람들이 봄을 좋아하는 이유로 들어 말하는 것들을, 예림은 봄을 싫어하는 이유로 들었다. 

 

 

 


 집 뒤쪽 언덕 너머에서 날아왔을 분홍색 잎들이 옥상 바닥과 평상 위로 잔뜩 떨어져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가 어딘지 모르게 축축해 보이기도 했다. 옥상 구석 물이 고인 곳에도 벚꽃잎이 수두룩하다. 예림은 평상 옆에 서서 뒤축을 꺾어 신고 나온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신발 앞코로 옥상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린 뒤, 철제 계단을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붉게 녹슨 계단 틈새에도 물 젖은 분홍색들이 많다. 마당에도 많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도 많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져 빗물 머금은 바닥을 뒹군다. 이렇게나 많이 떨어졌는데 아직도 나뭇가지에 붙은 게 많다는 게 신기했다. 

 


 삼월 마지막 주가 되면서 날이 풀릴 듯하더니, 꼭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다시 추위를 몰고 왔다. 입김 나오는 거 봐. 겨울이네, 아주. 예림은 정류장에 서서 삼월 막바지의 추위를 견뎠다. 한 시간 같은 십 분을 기다리자 저 멀리서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버스에 오르자 옷에 묻은 한기가 삽시간에 녹아내린다. 승객들이 버스에 앉기 전에 버스가 움직인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맨 뒷자리로 가 앉았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익숙한 곳들을 지나친다. 예림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새 꼬인 줄을 풀고 귀에 꽂은 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번 정류장은……. 그런 안내음이 이어폰 사이로 열두 번쯤 들렸을 때 옆쪽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예림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별안간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멋쩍은 기운을 담고 있었다. 예림은 눈을 아주 느릿하게 깜빡이며 왼쪽 이어폰을 뺐다. 손승완?

 


 “안녕.”
 “어…… 안녕.”
 “지금 학교 가?”
 “어.”

 


 예림은 잠깐 입을 다물고 차창 밖을 보았다. 늘 지나치는 곳인데 승완을 본 건 처음이었다. 원래 여기서 타나. 그 동네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없나……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승완이 다시 말을 붙였다. 예림아. 다시 승완을 보았다. 

 


 “노래 같이 들어도 돼? 나 이어폰을 안 가지고 와서.”
 “……나 최신곡 안 듣는데.”
 “나도 잘 안 들어.”

 


 바로 옆에 앉았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예림은 더 말하지 않고 오른쪽 이어폰을 건넸다. 승완이 제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낀다. 예림도 손에 들고 있던 왼쪽 이어폰을 꼈다.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열려 있는 귀로는 버스 안의 소음과, 바깥의 바람 소리와, 이번 정류장과 이다음 정류장이 어디인지 말하는 기계적인 안내음 따위가 앞다투어 들어온다. 이윽고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다음 노래로 넘어가는 그 찰나, 승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 노래 아는구나. 나도 이 노래 좋아해. 그런 말을 한다. 예림이 승완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노래 좋아해. 그런 말은 어쩐지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게끔 한다.

 

 

 


 -

 


 그날을 기점으로, 예림과 승완은 같은 버스에서 퍽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지금껏 마주치지 않은 게 신기하리만치. 어쩌면 내내 같은 버스를 탔는데 서로 의식하지 않아 발견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예림은 늘상 맨 뒷자리에 앉았고, 정거장을 열 개 가까이 지나치고 나면, 승완이 나타나 예림의 옆자리에 앉았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의 버스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구태여 맨 뒷자리까지 와 앉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둘은 버스에서 마주치는 날이면 나란히 앉아 갔다. 정해진 것처럼. 

 


 승완은 늘 이어폰을 까먹고 오는 것 같았다. 음악을 같이 들어도 되냐고 계속 물었으니까. 서너 번 정도 같이 앉았을 때부터 예림은 오른쪽 이어폰을 미리 빼놓게 되었다. 승완이 옆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면 다른 말이 없어도 이어폰을 내밀었다. 그럼 승완은 웃으면서 이어폰을 꼈다. 친구들은 따분하게 여길 옛날 노래나 재즈 음악을 승완은 지루해하지 않았다. 때때로 노래와 노래 사이의 간극에 제 목소리를 채워 넣었다. 이 노래 나도 알아, 또는 노래 되게 좋다, 같은 감상. 그러면 예림은 고개를 가만가만 끄덕이거나 노래 제목을 말해주었다. 

 


 하차할 때가 되면 이어폰을 빼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하면 줄 안 꼬여? 승완이 물었다. 꼬이는데, 귀찮아서, 그냥. 뚝뚝 끊기는 대답에 쉽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뒷문이 요란스런 소릴 내며 열리고 둘은 차례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추위 때문에 몸을 움츠리는 일은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고 날이 제법 풀린 덕이었다.

 


 같은 학교에 같은 반이니 같은 길을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은 후문을 통과해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간 뒤 교무실이 있는 건물로 걸었다. 미지근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교무실에 도착하면 앞선 사람이 열쇠함에서 열쇠를 챙겨 나란히 교실로 올라갔다. 가는 내내 둘 사이에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는데 불편하게 느껴지는 침묵은 아니었다.

 


 교실에 도착하면 각자 자리로 간다. 가방을 걸고 외투를 벗는다. 그러고 나면 승완이 예림을 부른다. 예림아, 아침 같이 먹을래. 그런 말을 한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 그런 말도 꼭 덧붙인다. 그러면 예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승완의 옆자리로 가 앉는다. 젓가락을 제 손으로 분리해서 주고, 우유도 같이 마시라며 입구를 열어 내민다. 그것들을 받고 나면 사온 건지 해온 건지 모를 아침을 함께 먹는다.

 


 그 모든 게 꼭 약속 같았다.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이어폰을 나눠 끼고, 열쇠를 가지러 가고, 아침을 같이 먹는 것. 이제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익숙해진 것. 지난 몇 년간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는데, 먹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침 식사가 주는 포만감에 익숙해져 있었다. 승완이 준비해오는 건 그때그때 달랐다. 김밥으로 시작했던 것은 어느새 가정집 식사처럼 넉넉해졌다. 예림은 도시락통 안에 정갈하게 담긴 반찬을 보며 가슴께가 홧홧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기분은 고맙다는 말 뒤로 숨긴다. 

 

 

 


 김예림과 손승완이 친한 사이인가, 하면 아닌 것 같았다. 안 친한 사이로 단정 짓기도 모호했다. 등교를 같이하고 아침을 같이 먹는 사이. 같이 먹는 사이. 같이 먹는다고 표현해도 되나. 이제껏 예림은 아침을 준비해온 적이 없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정신도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미지근하거나 찬물에 서둘러 씻고, 금방이라도 고장 날 것 같은 빨간 드라이기에 머리를 말릴 수 있을 만큼 말리고, 새것이었던 적이 없는 교복을 입고, 밑창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버스를 타러 나오기에도 바쁘다. 거기 아침을 준비하는 일을 추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편의점이나 24시간 하는 김밥 가게에서 아침을 살 수 있을 수도 없다. 그런 건 예림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마워, 잘 먹을게. 이제는 익숙해진 말이다. 그 뒤로 제 마음을 숨긴 채 예림은 젓가락을 움직였다. 

 

 

 


 3.

 

 
 수학여행 참가 신청서. 큼지막하게 적힌 제목을 읽었다. 그 밑으로 비교적 조그마한 글이 쓰여 있다. 학부모님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형식적인 인사와 수학여행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기간, 장소, 규모…… 일 인당 경비. 예림은 막힘없이 읽어내려가던 것을 멈췄다. 일 인당 경비. 그 말을 다시 읽었다. 사십만 원. 400,000원.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사십만 원. 사십만 원을 어디서 구해? 못 구하지. 못 가는 거야. 예림은 절취선 아랫부분은 읽지도 않고 서랍 속에 가정통신문을 처박았다. 못 가면 어때서. 서랍 속에서 빼지 않은 손끝에 종이가 걸린다. 예림은 손을 뺐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못 가도 상관없었다.

 


 부모님께 꼭 말씀드리고, 서명도 꼭 부모님이 하셔야 된다. 참가든 불참이든 서명받아 와라, 꼭. 근데, 안 가는 애들은 없지? 삼 학년 땐 수학여행도 없다. 안 갔다가 그때 가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아무튼, 서명 가라로 하다가 걸리면 바로 전화 건다. 알겠지? 반장이 걷어서 갖다줘. 인사하고 마치자. 차렷, 경례. 안녕히 가세요…….

 

 

 


 예림은 처박아뒀던 걸 다시 꺼내 절취선 아랫부분을 읽었다. 수학여행 참가 신청서, 참가, 불참. 불참 사유 반드시 작성.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집 가는 버스에서는 앉아 가는 일이 드물다. 이미 북적북적한 버스에 올라 억지로 몸을 끼워 탄다. 아직 초봄이건만 버스 안은 벌써 꿉꿉하게 느껴진다. 덜 마른 빨래들이 옷장 안에 몸을 뭉개고 있는 것 같다. 예림은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서서, 남은 손으로는 주머니 속 가정통신문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김예준 과외비 얼마지. 학원비는. 걔 입으로 들어가는 건 얼마일까. 반수. 반수는 일단 대학을 다니면서 준비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등록금은. 등록금은 낸 건가. 알 수 없었다. 냈을지 안 냈을지 모를 등록금을 빼더라도, 그 앞의 것들만 치더라도, 사십만 원은 훌쩍 넘을 거였다. 

 


 이번 달 알바비는 얼마일까. 주말에만 하니까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십은 되려나. 돼지 저금통에 얼마 넣어놨었더라. 둘 다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이번 달 월급과 돼지 저금통 배 속에 있는 돈을 합치면 사십만 원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수학여행 참가 신청서의 참가 부분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돼지 저금통은, 그건 이제 없지만, 그래도 그게 있었더라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림은 종이 끄트머리를 접었다 폈다 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

 


 널려있는 빨래를 걷어 집으로 들어간다. 집안에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하다. 예준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모양이었다. 거실 구석에 걷은 옷더미를 내려놓는다. 개어놓지 않은 이부자리 옆으로 두꺼운 책들이 가득하다. 발로 차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부엌으로 건너간다. 열 발자국이면 부엌에 닿는다. 개수대 안에 냄비가 있다. 냄비 안에 양념이며 면발이며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 게임 속에서 나는 소리는 부엌까지 넘어온다. 예림은 물을 틀었다. 끼긱, 하는 소리가 난다. 냄비 안쪽에 물을 다 채우고 나서 수전을 잠갔다. 가방을 내려놓지 않고 예준이 있는 방 문간으로 간다. 목을 앞으로 잔뜩 빼고 앉은 예준이 화면 속에 빨려갈 듯 집중하고 있다. 

 

 

 


 “학원 안 가냐?”
 “어, 오늘 쉬려고.”
 “왜 쉬는데.”
 “머리 아파서.”
 “미쳤냐? 학원비가 얼만데.”
 “아, 왜 지랄이야. 엄마도 뭐라 안 하는데.”
 “엄마가 뭐라 하면 듣긴 듣고?”

 


 지가 돈 벌어오나, 왜 지랄이야……. 예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뭐라고? 부정확한 발음에 알아듣지 못해 되묻지만 예준은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는다. 탁한 눈을 노려보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이부자리를 밟고 벽에 있는 두꺼비집을 내렸다. 몇 초 안 지나서 방안에서 욕설이 들린다. 신발을 꺾어 신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어폰은 왜 몇 분만 넣어놔도 꼬일까. 예림은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잔뜩 꼬인 줄을 푸느라 고군분투했다. 간신히 엉킨 줄을 다 풀고 이어폰을 꼈을 땐 이미 몇 정거장이나 지나 있었다. 예림은 앞쪽 창을 보았다. 버스는 막 대교로 진입하고 있었다.

 

 

 


 대교 위에 다다랐을 때 예림은 다시 옆쪽 창문 밖을 보았다. 늦은 오후의 주황빛 햇살이 강물 위를 물들이고 있다. 일렁이는 물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하차 벨을 누른다.

 

 

 


 예림은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쇠 의자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저번처럼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 의미 없이 보도블록 위를 발로 두드렸다. 왜 여기 왔지.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사는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갈 곳도 없는데……. 굳이 이 정류장에 내리지 않았어도 될 이유가 끝없이 떠오른다. 보도블록을 두드리는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에 갔던 방향으로 걸었다. 아파트 단지를 따라 걸으면 금세 학원가가 보인다. 그 앞을 지나쳐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로 넘어왔다. 고소한 냄새가 퍼질 때쯤 몸을 틀어 횡단보도 앞에 선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자연스레 승완과 여기서 마주쳤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이 시간쯤이었는데. 이상한 기대감이 마음 한 켠에 차올라 울렁거린다. 그사이 빨간불이 사라지고 보행 신호가 된다. 횡단보도를 향해 한 발자국을 뗐을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예림은 숨을 들이마셨다. 돌아보자 승완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 얼굴이 새빨갰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가만히 쳐다보고 서 있자 승완이 멋쩍게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 예림아.”
 “……어, 안녕. 뛰어왔어?”
 “응. 너 보이길래.”
 “왜?”
 “어? 아, 그냥 반가워서. 오늘도 친구 집에서 놀다 가는 거야?”
 “……어.”
 “밥 먹었어?”
 “아니.”
 “같이 먹을래? 너 바쁜 거 아니면.”

 

 

 


 밥 굶고 다니게 생겼나. 왜 맨날 내 얼굴만 보면 밥 먹자고 할까. 아침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예림은 지갑 속에 얼마가 있는지 대충 가늠해보았다. 얼마가 있었지. 적어도 만 원짜리 두 장은 있었던 것 같다. 대답이 없자 승완이 다시 말을 꺼낸다. 혹시 지갑 안 들고 온 거면……. 말이 끝나기 전에 예림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한다. 오늘은 지갑 들고 왔어. 같이 먹자.

 


 그사이 보행 신호가 끝나고 다시 빨간불이 들어온다. 둘은 횡단보도를 뒤로 하고 음식점 거리를 향해 걸었다. 오늘은 내가 사줄게. 예림의 말에 승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별안간 승완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말해 학원가를 벗어나 초등학교 앞까지 걸었다. 거기 떡볶이가 진짜 맛있거든. 초등학생 때 맨날 사 먹었어. 떡볶이 맛이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예림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걸은 지 얼마 안 돼서 승완이 말한 분식집이 나온다. 분식집은 초등학교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맨날 사 먹을 만도 했다.

 

 

 


 초등학교 수업이야 마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 분식집 안은 휑뎅그렁했다. 빈자리 아무 곳에 앉아 메뉴판을 훑었다. 떡볶이 일인분 이천 원. 순대 일인분 이천오백 원. 예림은 흘끔 승완을 보았다. 메뉴판을 살피던 승완이 고개를 든다. 

 


 “떡볶이 2인분 시킬까?”
 “떡볶이만 먹게?”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승완이 고개를 주억이더니 바깥에 있는 이모에게 가 주문하고 돌아온다. 할 말이 없어 관심도 없는 가게 내부를 훑었다. 커버가 씌워져 있는 벽걸이 선풍기, 뉴스 채널이 틀어져 있는 TV, 벽에 붙은 낡은 메뉴판, 강렬한 색을 담고 돌아가는 슬러시 기계. 순서대로 봤다가 다시 역순으로 돌아갈 때쯤 이모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건 떡볶이와 순대였다. 예림이 의아한 얼굴로 승완을 보았다.

 


 “순대도 시켰어.”

 

 

 


 묻기도 전에 대답한다.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런 말을 잇는다. 예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완이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예림에게 내민다. 예림이 받고 나서야 자기 젓가락을 꺼내 손에 쥔다. 둘은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인다. 떡볶이 이인분과 순대 이인분은 금세 바닥을 보인다. 

 

 

 


 빈 접시 위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해야 하는 말을 나눈다. 다 먹었어? 갈까. 응.

 

 

 


 예림은 휴지로 입가를 닦고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계산하려고 했는데 선불이었댄다. 저 학생이 주문할 때 계산했어. 그 말에 예림은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자리를 정리한 승완이 뒤늦게 나온다. 속이 울렁거렸다. 체한 것처럼.

 

 

 


 초등학교를 등지고 걷다가 예림이 우뚝 섰다. 승완도 같이 멈춰 서서 예림을 돌아본다.

 

 

 


 “사천오백 원 줄게.”
 “어? 아냐, 안 줘도 돼.”
 “왜?”
 “……우리 동네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예림은 구깃구깃한 교복 치마를 매만졌다. 왜? 돈을 왜 안 받아. 같이 먹어놓고. 너 나한테 왜 자꾸 아침 같이 먹자고 해? 왜 그러니. 왜 그래. 대체 왜 그러냐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머리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그냥…… 반 친구니까. 동네에서 보니까 좋아서 그래.”

 

 

 


 말을 잃은 예림은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노란색 점자 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그게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다. 예림은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다음엔 내가 사줄게.”
 “응.”

 


 멈췄던 발을 다시 뗐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봄바람이 선선히 불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

 

 

 


 집에 돌아오니 예준은 없었고, 집안 꼬락서니는 개판이 돼 있었다. 예준이 분에 못 이겨 바닥으로 던질 수 있는 건 다 던진 모양이었다. 쪼다 새끼. 예림은 널브러진 것들을 피해 걸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주머니 안에 찌그러져 있던 가정통신문을 꺼냈다. 종이를 바닥에 대고 절취선 아래의 빈칸을 채워간다. 반, 번호, 이름. 불참, 동그라미. 불참 사유. 거기서 손이 잠깐 멈칫한다. 공부. 망설이다가 그런 말을 적는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달리 적을 말이 없었다. 학생 서명란에 서명을 하고, 그 옆 학부모 서명란에도 왼손으로 서명을 한다. 회색 종이를 한 번 더 훑은 뒤 가방에 넣었다.

 


 곧 집에 돌아올 부모님이 집안 꼴을 본다면 쓸데없는 말을 할 게 뻔해서, 예림은 바닥을 나뒹구는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탁상시계, 사진첩, 청록색 테이프 같은 것들……. 

 

 
 4.


 아르바이트 시간은 오후 네 시부터 밤 열한 시. 원래는 오전 타임이었고, 오후에 하더라도 열한 시까지 하면 안 되지만 점장이 부탁했고 예림은 알겠다고 했다. 돈을 주니까. 어찌 됐든 출근 시간이 늦는 만큼 주말에는 평일보다 늦게 일어날 수 있다. 예림은 여덟 시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후 네 시까지 가는 것치고는 이른 기상 시각이지만, 어차피 예준이 일으키는 소음 덕에 오래 잘 수 없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느지막하게 준비해도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다. 그 시간이 되면, 엄마 아빠는 일찍이 나간 지 오래고, 예준이 컴퓨터를 끄고 잠자리에 들어 집이 조용해진다. 그러면 예림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집에 앉아 있는다. 이따금씩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그득하다. 예림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얼마간 바라보다 집을 나섰다.

 

 

 


 벚나무마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가 다른지, 어느 나무는 벌써 꽃을 다 떨어뜨리고 연둣빛만 남았는데, 어떤 나무는 아직 벚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규칙 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정류장으로 걸었다. 편의점이 있는 동네로 넘어가는 버스는 노선도 많고 자주 온다. 정류장에 도착한 지 십 분도 안 되어 버스가 앞에 선다. 버스를 타고 동네를 떠나 대교를 건너면 하차 벨을 누른다. 

 


 출근까지 시간이 남아 근린공원으로 걸었다. 이 동네 벚꽃은 꼭 개화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분홍빛이 선연했다. 빈 벤치에 앉아 공원을 바라보았다. 학원가 근처에 있는 공원이라 그런가, 예림 또래처럼 보이는 애들이 많았다. 이따만한 가방 메고 걷는 애들. 학원 다니는 애들. 예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다. 예림은 휴대 전화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네 시가 다 되어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원에서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예림이 일하는 편의점은 학원가 맞은편에 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교차로라 그런가, 보행 신호가 자주 들어오지도 않고 시간도 짧았다. 예림은 쌩쌩 지나다니는 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다른 차가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걔랑은 맨날 이쪽에서 마주쳤지. 이 동네 사는 애니까 이쪽 학원 다니나.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동차만큼이나 빨리 지나친다. 그사이 차들이 정지선에 멈춘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예림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카운터 뒤에 앉아 있던 전 타임 알바와 인사를 나누고 조끼를 입었다. 작은 통 안에 있는 명찰 중에서 김예림이라는 이름이 적힌 걸 찾아 바코드를 찍고 가슴팍에 달았다. 맞다, 오전 폐기 몇 개 담아놨어요. 필요하면 드세요. 예림이 고개를 끄덕이고, 알바생이 인사와 함께 가게를 떠난다.

 


 학원가에 있는 편의점이라 학원 쉬는 시간이나 마치는 시간이 아니면 대체로 한산하다. 그렇다고 해서 손님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띄엄띄엄 동네 주민들이 방문한다. 손님이 없는 사이 예림은 근무일지를 미리 작성했다. 16:00~23:00. 근무일지를 덮고 매대 쪽으로 나간다. 저녁 시간에는 웬만해선 폐기가 나오지 않지만, 괜히 삼각김밥과 도시락 쪽을 뒤적거렸다. 이거 맛있는 건데. 어차피 학원 다니는 애들이 다 사 먹겠지. 예림은 다시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와서, 지난겨울 난로에 녹아내려 높이가 비뚜름한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몸이 노곤했다. 예림은 턱을 괴고 앉아 밀려드는 졸음과 싸웠다.

 


 드문드문 들어오는 손님들을 응대하다 보니 날이 저문다. 편의점 문 너머로 건너편을 흘끗 보았다. 벌써 학원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예림은 플라스틱 의자를 옆으로 빼고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편의점 문이 열린다. 건조한 인사말을 뱉으며 문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승완이었다. 잠깐 출입구에 멀거니 서 있던 승완이 친구의 재촉에 매대 너머로 간다. 

 


 얼마 안 되어 승완과 친구가 다시 나타난다. 친구 손에는 과자 같은 게 들려있고, 승완의 손에는 비타민 음료수 세 개가 들려있다. 예림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계산 따로 해드릴까요? 아니요, 같이 해주세요. 승완이 대답한다. 계산대 위에 쏟아진 것들의 바코드를 찍었다. 얼마라고 말하기도 전에 카드를 내밀어 온다. 잠자코 받아 리더기에 꽂았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이번에는 친구가 대답한다. 예림이 다시 카드를 내밀었다. 

 

 

 


 승완의 친구가 제 것을 챙겨 먼저 나가고, 승완이 비타민 음료수 세 병을 챙겨가나 싶더니 하나를 계산대 위에 남겨놓는다. 예림이 멀뚱히 승완의 얼굴을 보았다. 너 마셔. 대답도 전에 나머지 두 병만 가지고 나가버린다. 예림은 계산대 위에 남은 비타민 음료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

 

 

 


 월요일 아침.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정통신문을 꺼내 승완에게 내밀었다. 가정통신문을 받아든 승완이 예림을 올려다보았다. 읽어서 미안. 근데 예림이 너 수학여행 안 가? 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라는 이유를 적어놔서인가, 왜 안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렇구나. 승완이 가정통신문을 제 서랍에 넣었다.

 

 “아침 먹을래?”
 “아니, 오늘은 먹고 왔어.”

 


 거짓말이었다. 간밤에는 김예준과 치고받고 싸우느라 아침은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왔다. 승완이 뺨에 있는 밴드를 멀뚱히 바라본다. 왜 붙였느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다른 말을 한다.

 


 “뭐 먹었는데?”
 “……그냥 반찬이랑 밥.”
 “많이 먹었어?”
 “많이는 아닌데.”
 “그럼 우유라도 마셔. 나중에 배고파.”

 

 

 


 싫어? 예림이 고개를 내저었다. 옆자리 의자를 빼고 앉자 늘 그랬듯 젓가락과 우유를 내민다. 기분이 이상했다.

 

 

 


 5.

 

 수학여행에 불참한다고 해서 그날이 휴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불참하는 애들을 모아 4교시 동안 자습을 시킨다고 했다. 다른 애들이 기대감 넘치는 기분으로 일어났을 수학여행 출발일, 예림은 같은 시간에 같은 기분으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사월로 넘어오면서 꽃샘추위가 누그러져 미지근한 물도 제법 견딜 수 있게 되었다.

 

 

 


 한적한 버스에 타 늘 앉는 자리에 앉는다. 꼬인 이어폰 줄을 푼다. 다섯 정거장이 지날 무렵이면 꼬인 이어폰 줄이 풀린다.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본다. 지겨운 풍경인데 보게 된다. 차창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예림은 흔들리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꽉 감았다.

 


 다음 정류장은……. 잔잔한 노랫소리 사이로 익숙한 정류장 이름이 들려온다. 다른 날이라면 손승완이 탔을 그 정류장이다. 예림은 눈을 뜨지 않았다. 버스가 정차한다. 사람들이 차곡차곡 버스에 오르고, 섰던 버스가 다시 움직인다.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별안간 누가 어깨를 두드린다. 예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안녕.”
 “……너 수학여행 안 가? 왜 교복 입고 있어?”
 “응. 안 가.”
 “왜?”
 “공부하려구.”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는데 승완의 입에서 나오니 진실되게 느껴졌다. 예림은 떨떠름한 얼굴로 승완을 보고 있다가, 이어폰을 빼 내밀었다. 들을 거지. 승완이 고개를 끄덕인다. 때마침 듣고 있던 노래가 끝나고 다음 곡이 재생된다. 이 노래 되게 좋아하나 봐. 승완이 속닥거린다. 어떻게 알아. 예림의 말에 승완이 웃는다. 너 나한테 이어폰 줄 때마다 이 노래 듣고 있는 거 몰랐구나……. 봄 햇살이 계속 쏟아져 내린다. 예림은 대답 없이 고개를 찬찬히 끄덕이고 다시 창 너머를 보았다.

 

 

 


 늘 내리는 정류장에 같이 내려 걸었다. 원래는 별다른 대화 없이 걷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말을 주고받으며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날씨 많이 풀렸다.”
 “그러게.”
 “벚꽃도 거의 다 떨어지고.”
 “아직 많은데.”
 “저 정도면 거의 다 떨어진 거야. 아쉽다.”
 “난 빨리 다 떨어지면 좋겠는데.”
 “진짜? 왜?”
 “그냥 벚꽃 싫어해서.”
 “비염 있어서?”
 “아니, 그냥 봄을 싫어해.”
 “신기하다. 봄 싫어하는 사람 드문데.”
 “찾아보면 나 같은 사람 많을걸.”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난 진짜 싫어. 봄 없어지면 좋겠어.”

 


 하도 극단적인 말이라 농담으로 여겼는지 승완이 작게 웃는다. 예림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몇 년 있으면 봄이 없어질 수도 있댔어.”
 “진짜?”
 “지금도 봄 되게 짧아졌잖아. 이러다 보면 완전 사라질걸.”
 “막상 사라지면 너두 좀 아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아쉬울 게 뭐가 있지. 봄이 없어지면…….

 


 “벚꽃도 못 보고, 개나리도 못 보고, 더운 거 아니면 추운 거 뿐이잖아.”
 “그게 낫지 않나. 환절기에는 감기 걸리기도 쉽고…….”
 “그래도, 봄 없어지면 이런 거 다시는 못 볼 텐데. 막, 벚꽃 날리는 거 이런 거…….”
 “그거 봐서 뭐 해.”
 “보면 기분 좋잖아. 예쁘기도 하고.”
 “그런가…….”

 


 후문을 향해 걷는 동안 벚꽃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예쁜 건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은 것도 모르겠고. 한데 봄이라는 계절이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건 맞는 것 같았다. 예림은 봄이 좋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승완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나란히 걸으면서 별것 아닌 대화를 주고받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왜 수학여행에 안 갔을까. 정말 공부하려고 그랬나. 저번에 이어 해소되지 않을 의문들이 떨어지는 벚꽃 사이에 섞여 내린다. 공부하려고 그런 게 아니면, 아니라면……. 예림은 생각에 억지로 제동을 걸고 다른 곳을 보았다. 승완은 여전히 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예림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 맞다. 나 너한테 줄 거 있는데.”
 “뭐?”
 “이거. 이어폰 안 꼬이게 해주는 거야.”

 

 

 


 승완이 캐릭터 모양으로 된 이어폰 라인홀더를 내밀었다. 예림은 멍청한 얼굴로 승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줘? 그냥, 없는 거 같아서. 싫어? 예림이 고개를 내젓자, 손을 가져가더니 손바닥 위에 라인홀더를 올려둔다. 줄 푸는 거 귀찮잖아. 예림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 말에 승완이 슬쩍 웃는다. 내가 좋아서 주는 건데 왜 고마워. 예림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에 넣지 못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별안간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고 속이 울렁거리고 목이 뜨끈해지는 감각.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손 끄트머리까지 다 떨리는 느낌. 김예림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느낌을 뭐라고 부르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건 결코 열등감 같은 게 아니다. 김예림은 알고 있다. 그래서 싫었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

 


 밥상머리에서 예준이 난데없이 자취 얘기를 꺼냈다. 통학하기 버거우니 자취를 하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기숙사는 어쩌고. 집과 학교의 거리가 다른 애들에 비해 멀지 않아 밀려났다는 얘기를 한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기숙사에서도 밀려나는데 뭐가 버겁다는 건지. 세 명이 잠자코 듣고 있자 제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끝도 없이 자취하고 싶다는 말을 주절거린다. 이 형편에 자취는 무슨 자취.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아빠는 또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예림은 수저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세 명의 시선이 이쪽에 와 닿는다.

 

 

 


 “자취? 자취하면 굶어 죽기 딱 좋겠네. 혼자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게 자취는 지랄…….”
 “아, 김예림 또 시작이네.”
 “너는 씨발 집안 꼬라지 알면서 자취시켜달란 소리가 쉽게 나와?”
 “야, 씨발이랬냐?”
 “어, 이 씨발놈아.”
 “미친년이 처돌았나…….”

 

 

 


 밥상머리에서 뭐하는 거야! 내내 가만있던 아빠가 버럭 호통을 친다. 예준이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그조차도 우스웠다. 등신 쪼다 새끼. 혼자 있으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새끼가……. 예준이 벌떡 일어나 밥공기를 예림에게 냅다 던졌다. 푸석한 밥풀이 바닥에 쏟아진다. 예림도 같이 일어났다. 

 


 등신 새끼야, 빨래 한 번이라도 널어봤냐? 세탁기 돌려본 적은 있어? 설거지는 해본 적이 있긴 하고? 할 줄은 알아? 니 손가락에 물 묻혀본 적은 있어? 너 할 줄 아는 거 없잖아. 키보드에 손 올리고 두들길 줄이나 알지, 공부를 하냐 뭘 하냐 니가. 내 저금통이나 처 털어가지, 내 지갑에 손이나 대지, 이 집에서 니가 뭘 하냐고 하기는 하냐고 니가…….

 

 

 


 -

 

 

 


 예림이 이슥한 시간에 버스를 타는 일은 드물었다. 해 떠 있을 때면 지겹게만 느껴지던 바깥 풍경이 조금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예림은 이어폰을 꺼냈다. 항상 마구잡이로 엉켜있던 이어폰은 줄감개 하나로 선이 잘 정리돼 있었다. 똑딱이를 빼고 이어폰을 꼈다. 

 


 어느새 버스가 대교를 건넌다. 강은 불빛이 닿는 곳을 제외하면 죄다 시커멓게 보였다. 버스가 대교를 떠날 때쯤 일어나 하차 벨을 눌렀다.

 


 정류장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예림은 정류장에서 나와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학원가를 향해 걸었다. 노래를 작은 소리로 듣고 있어 도로의 소음이 밀려 들어온다. 

 


 오늘은 못 만나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또 울렁거렸다. 주머니 속에 있는 홀더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걔는 그냥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지. 단추가 헐거운 블라우스나 구겨진 교복 치마나 무릎 나온 체육복이나 세탁해도 깔끔해지지 않는 신발 같은 거. 손승완이 입고 있는 깔끔한 블라우스나 잘 펴진 치마나 말끔한 체육복이나 늘 바뀌는 신발 같은 것과 비교되는 것들.

 


 노력해도 감출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잔뜩 묻어 있는 게 불쌍해서 잘해주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그렇게 물어보고, 마주치면 그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거 알았다. 다 알아서 상관없다. 김예림이 견디기 힘든 것은, 알고 있음에도 자꾸 이상한 마음이 든다는 거였다. 그런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예림은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김예림?”

 


 가까운 데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예림이 대답을 않자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들어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슬며시 뺀다. 예림이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던 승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얼굴이 왜 그래. 그런 걱정 가득한 말을 한다. 약 발랐어? 예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약 사러 갈까. 지갑 없어. 내가 사주면 되잖아. 그런 말을 쉽게도 한다.

 


 그러면 예림은 다른 말을 생각한다. 나 너 싫어해. 이런 거. 사실은 너 좋아해. 그런 거. 좋아서 준다는 게 무슨 의미였어. 그런 말. 사실은 알고 있음에도. 손승완이 굳이 그 버스에 타는 이유를, 그 시간에 나오는 이유를, 아침을 같이 먹자고 하는 이유를, 사소한 친절을 베푸는 이유를, 그 모든 의미를 알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생각한다. 네가 쉽게 말하는 게 나한테는 어렵다고. 네가 쉽게 확신할 수 있는 그것들이 나한테는 너무 어렵다고. 그래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언젠가 들었던 연속등반인가, 그딴 게 갑자기 떠오른다. 한 명이 떨어지면 다 같이 죽는 거라는 말. 그러면 또 다른 말이 떠오른다.

 

 

 


 나와 너는 너무 다르다는 말.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다르듯이 앞으로도 다를 거라는 말. 그런 확신. 경험에 기대어 확신할 수 있는 미래. 너는 위로 갈 거고 나는 아래로 갈 거라는 말. 우리는 다르다고, 다른 사람들끼리는 함께 할 수 없다고. 내 미래에는 네가 없고 네 미래에는 내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사월이 빨리 지나가 버리면 좋겠다고. 아무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월이.

© SEASON OF YERI WENDY , SPRING ,  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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